[기획] 남편 죽음도 숨기는 청소용역 노동자들
고용불안에 성폭력까지 무방비 노출…지하철공사 “책임 없다” 수수방관
평소 잘 보이지 않으면 ‘고역’ 신세
30년간 수의계약 무소불위 권력으로
서울지하철 역사에서 청소업무를 하는 박이경씨(가명, 50)는 지난 2002년 9월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경조사 휴가를 신청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을 동료에게 대신 부탁했다. 몇 달 뒤 시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당당하게’ 경조사 휴가를 냈다고 하는 그가 남편의 죽음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박씨는 “관리장이 일상적으로 성적요구를 하며 괴롭혔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 노골적으로 더 심하게 괴롭힐까봐 숨겼다”며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고 절대 알려지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 업체의 관리장인 아무개씨는 심한 성적농담을 하는 것은 다반사며, 청소일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오늘 여관방을 잡아놨으니 오라”는 말을 버젓이 할 정도로 성폭력이 습관화돼있다고 한다. 박씨는 그만 보면 가슴이 떨리는 증상으로 항상 ‘청심환’을 소지하고 다닌다며 가방에 들어있는 약봉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성폭력 사건이 비단 박씨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데 있다.
박씨는 “다른 역에서 근무할 때 관리장으로부터 성적요구를 받아 힘들어하던 여자가 퇴사한 뒤 1년 만에 뇌졸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소용역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전국여성연맹의 이찬배 위원장은 “지하철에서 청소일을 하는 여성노동자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성폭력이 어느 정도 만연돼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박씨로부터 이런 사실을 접하고 서울지하철공사가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성폭력 원인은 고용불안
박씨가 일하는 곳은 재향군인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향우용역’이라는 업체로, 지난 74년 지하철 개통 때부터 30년째 서울지하철공사와 수의계약 형식으로 청소용역계약을 맺고 있다. 향우용역은 1,200여명을 고용해 1~4호선의 118개 역사 청소를 맡고 있으며, 재향군인회 소속 관리장이 보통 2개역에 1명씩 배치돼 청소반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 현장의 작업반장과 달리 청소작업 업무의 지휘감독 뿐만 아니라, 채용이나 해고 등 인사권의 책임까지 갖고 있어 현장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청소일이란 것이 담당 업무에 따라 먼지만 쓸어내고 끝낼 수도 있고 윤이 나도록 힘들게 일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어, 관리자에 따라 노동강도는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에 관리장의 눈 밖에 날 경우 고역을 감수해야만 한다. 관리장들이 당당하게 성적요구를 할 수 있는 배경인 셈이다.
향우용역에도 노조가 있지만, 상급단체가 없는 독립노조이며 관리장들이 대의원을 맡고 있고 실제로 이들이 노조를 운영하고 있다.
문제의 관리장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의 경우 몇 해 전 한달에 무려 15명이 해고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 50~60대 여성으로 생계문제가 걸려 있어, 한달에 70여만원에 불과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이나 관리장의 횡포에 직접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향우용역은 규정상 60세가 정년이지만 관행상 63세까지 계약을 자동연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관리장에게 결정 권한이 있어, 정년이 가까운 여성노동자들은 관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전전긍긍해야만 한다. 지난 13년 동안 같은 역에서 근무하다 이번 달에 60세 정년을 맞은 이형숙(가명)씨는 “꼭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아직도 계약연장을 해준다는 소리를 안하고 있다”며 “보통 때 관리장에게 먹을 것 사다주고 선물 사주면서 잘 보여야 하는데, 난 관리장이 평소에도 청소아줌마들한테 욕하고 맨날 비아그라 같은 이야기만 하고 해서 너무 싫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안했더니 차별당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향우용역 측은 관리장의 개인 차원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지하철 공사에서 연락을 해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데, 그동안 성희롱 예방교육도 해왔기 때문에 회사 차원의 문제는 아니고 문제로 드러나면 필요한 조치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발생한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서는 사실을 확인해줄 수 없다며 언급을 회피했다.
서울지하철공사는 수수방관
이와 관련, 이찬배 위원장은 “관리장 제도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도급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이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재 지하철 청소용역 업무는 불법파견 소지도 있다”며 “서울지하철공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도급계약으로 인정되기 위해선 노무관리나 경영상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하는데, 지하철 역장이나 관리자들이 청소관리나 인사권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 실제 지난 2002년 4호선 모역에서 향우용역 관리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역장이 직접 나서 사건을 조사하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하철공사 관계자는 “성폭력 문제는 향우용역 내부 문제고, 공사는 청소업무에 대한 계약만 맺었기 때문에 조사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가 “불법파견이나 위장도급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며 불법파견 의혹에 대해 부인했다.
전국여성연맹은 지난 3월 서울강남노동사무소에 서울지하철공사를 상대로 불법파견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서울지하철노조와 여성단체 등 민주노총 차원에서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의 성폭력 피해 실태와 고용불안 문제와 관련한 대책위 구성이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송은정 기자(ssong@labornews.co.kr)
ⓒ매일노동뉴스 2004.05.25 10:4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