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죽어간다. 누군가의 부모이자 소중한 자식이었을 이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힘겹게 삶을 이어왔을 이들이 이윤 전쟁에 맨몸뚱이 총알받이로 나가 죽어간다.
안전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은 일하다가 떨어져죽고, STX조선 비정규직 노동자는 메인 스위치가 차단되지 않은 채 크레인에서 전기작업을 하다 감전되어 죽고, 무전기 등 안전을 지켜줄 통신장비 없이 신태인 철로에서 침목 교체 작업을 하던 외주하청 노동자들은 열차에 치여서 죽는다. 남들 쉬는 일요일에 기아자동차 용역노동자는 공조기 물빼기 작업을 하다가 감전되어 죽고, 밀폐된 현대중공업의 탱크 안에서는 기본적 안전수칙도 지키지 못한 채 유독성 세제로 세척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질식해서 죽는다. LG화학 여수공장에서는 안전교육 제대로 받지 못한 도급 노동자가 반응기 맨홀 뚜껑을 열다가 뚜껑에 맞아서 죽는다.
이것뿐인가 무거운 가방 메고 아이들을 가르치러 다녔는데 회사는 휴회를 받아주지 않고 미납급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라 하니, 구몬학습지 노동자는 빚을 잔뜩 지고 스트레스로 죽는다. 150만원을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했던 현대모비스 하청 노동자는 과로로 죽는다. 여기저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산업안전보건법상 반드시 설치하도록 되어 있는 안전장치들은 사치이다. 원청과 하청이 서로 산업안전의 책임을 떠넘기며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유해 위험작업도 마음대로 시킬 수 있고, 아무리 피곤해도 군소리 없이 일하는 비정규직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손에 딱 맞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 ‘기계’들은 쓸모없어지는 순간 그냥 버려진다. 부천 LG백화점은 리모델링 공사 중 추락사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미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상 영업’을 못해 고객들에게 미안하다고 플래카드를 내건다. 안전참도 없고 조명등도 없는 현대중공업 현장의 16m 수직사다리에서 일하다가 떨어져죽은 하청노동자를 놓고 하청업체는 ‘재해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시하고, 원청은 ‘사고 당사자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노동자가 죽어간 그 사다리에서 여전히 똑같이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을 한다.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지하에서 노동하다 죽은 세 명의 지하철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도 결국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누가 저승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모두 공평하다고 했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모두가 불공평하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안전장치도 별로 없이 위험한 작업에 내몰려 죽음과 마주하고 일했다. 그러다가 죽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죽음을 인정받기 위해 죽은 이후에도 투쟁해야 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이윤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에서 그 잘난 ‘이윤’을 위해, 누군가의 2만달러 소득을 위해, 누군가의 경쟁력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그리고 나서 구겨져 버려졌다.
누구의 생명이든 모두 소중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노동자들의 생명을 바꿀 수는 없다. 모든 노동자는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 죽거나 다치면 제대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다 다쳤다면 그 작업환경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그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어도 현실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유연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시대에서 ‘비정규직’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자, 미래의 우리 모습이다. 살아서 건강하게 노동할 권리가 ‘경쟁력’이나 ‘유연화-비정규직화’라는 무소불위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무력화되도록 내버려둘 때, 바로 내가 그렇게 억울하고 불공평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한 무례를 더이상 용납하면 안 된다.
김혜진/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