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내용이 이것은 아니었지만 여천산단을 생각하면 늘 이 과제가 떠오릅니다. 마침, 민주노동당에서도 환경위원회를 준비하고 있고, 전면적이지는 않았지만 화물연대 투쟁에서도 경유세 인하와 관련한 관점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의 논의는 늘 제자리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습니다.

퍼온 글이 2001년 글이고, 다소 딱딱하고 앙상하긴 해도 ‘환경-노동-신자유주의’ 전체를 아우르는 글입니다. 노건연이 이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 ‘기업살인법 운동’을 고민하면서, ‘여천산단’을 고민하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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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손잡아야 한다
– 김석윤 (민주노동당 대전시 지부당원)
(출처: 노동사회 2001년 6월호, 통권 55호)

환경문제를 외면하는 노동운동은 이익집단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며, 퇴행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세력으로 남을 것이다. 반대로 노동운동과 함께 가지 않는 환경운동은 엘리트나 환경 투사만의 박제화된 캠페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한다.

‘환경’과 ‘노동’. 언뜻 보기에는 이 두 낱말의 연관을 찾기는 쉽지 않다.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은 특유의 일원론에 입각하여, “생태계의 파괴는 자본주의에 의해 비롯된 것이므로, 생태환경을 보존하는 길은 자본주의의 타도뿐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철의 장막’이 걷히고 난 후 드러난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생태적 참상은 그런 주장을 무색케 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서구의 생태주의자들은 생태환경 문제에 둔감한 노동운동으로부터 독립하여 녹색당(green party)이라는 새로운 정치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서로 의지했던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는 서서히 종언을 고하고 있다. 공해와 산재 문제로부터 출발한 환경운동 단체들은, 산재가 빈발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사업장의 ‘악덕 기업주’에게 환경상(賞)을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또 노동조합은 간척사업 등 환경파괴 행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고용안정’을 위해 이를 조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은 핵발전소 폐쇄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에 민주노총의 일부 노동조합은 공공연하게 도전하고 있다. 그들이 반핵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자신들이 그곳에 고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운수노동자들이 정부의 유가인상에 맞서 유류세 인하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 후 협상의 결과로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유류세 인하방침을 내놓자, 사회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녹색당이 다시 반대하고 나섰다. 조금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민주노동당 모 지부에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회원인 당원들과 환경운동을 하는 당원을 사이에서 충치 예방을 위한 수돗물 불소화 사업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연대

신자유주의의 유령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보통 다음과 같은 논리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다.

– 국경 자체의 한계나 차이를 뛰어넘어, 처음부터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경영단위로 삼는, 보다 공세적이고 전략적인 기업활동을 하자.
–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각종 규제와 제한의 철폐(노동의 유연화 포함)를 핵심과제로 하자.
– 이제 파이를 서로 많이 갖기 위해서 싸울 것이 아니라 파이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합심하자.

이러한 요소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노사정 사이의 사회적 합의” 등을 기반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 및 생활양식을 마치 전세계의 표준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이를 안착시키려 하고 있다. 위의 논리 중에서 우리는 ‘파이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선진’ 복지사회에서 노사가 크게 만들어 잘 나눠먹었던 파이의 원천은 다음 세 가지 수준에서 조달되었다.

첫째는 자국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둘째는 이른바 후진국, 제3세계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셋째는 모든 노동자들의 ‘협조’로 전지구적 범위에서 진행된 자연생태계(물, 공기, 숲, 산, 바다, 강, 개울 등) 파괴의 대가였다. 우리도 과연 노사가 ‘합심’하여 이러한 선진국의 전철을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가진 천연자원을 우리의 조건에 맞게 아끼고 가꾸면서 공동체 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더욱 발전시켜내는 독자적인 사회경제 발전모델을 모색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후자의 방향으로 우리의 길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각기 독립적으로 자신의 운동영역을 고수해왔던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공동의 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상보관계를 맺으며,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을 조직해야만 할 것이다.

연대를 위한 운동진영의 과제

환경운동의 과제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환경파괴를 일삼고 있는 기업과 자본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가 없는 가운데, 현상대응 수준의 운동만을 벌이고 있는 기존 시민단체의 환경운동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업까지도 환경운동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 환경운동의 흐름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대중들의 힘을 아래로부터 모으고 조직화하지 못한 채, 상층의 논의나 언론플레이에 의존하는 운동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명망가 중심의 환경운동은 조직의 경직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며, 실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셋째, 환경사회단체의 지향과 운영방식과 실천이 정당의 그것과도 달라야 하며, 노동조합의 그것과도 달라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문제제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경기악화 가능성을 이유로 지구온난화 협약에 반대하는 미국 노총의 정책, 그리고 핵발전을 지지한다거나 정부의 개발우선 정책에 기대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노동조합 운동은 민중을 열악한 환경과 병인(病因) 속에 방치하는 것이다. 지난날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레이온 생산설비의 수출을 막지 못한 것은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핵발전 지지나 정부의 개발우선 정책에 기대는 것은 노동운동의 대의와 장기적 비전을 갉아먹는 자충수임이 분명하다.
노동운동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점은 자신이 표방하는 사상이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풍요롭고 균등한 소비”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150년 전의 맑스가 생태문제에 소홀했던 것은 시대의 한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자원고갈과 폭증하는 인구문제에 직면한 지금의 노동운동은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에 눈뜨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생태주의는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빈곳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의미한 충격이다. 예를 들면, 최근의 유가인상 반대투쟁에 있어서도 유류세 인상은 곧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이므로 이에 반대하여 유류세 인하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단선적인 사고방식 대신, 유류세의 일정 부분을 의무적으로 청정한 환경을 위해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안 등이 요구된다. 또한 소득수준에 따른 환경부담세 신설 등의 다양한 정책대안이 필요하다.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환경에 부담을 주는 생산력 향상과 과잉생산을 유도하고 있는 현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노동운동이 앞장서서 모색해야 한다.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은, 내가 속해 있는 민주노동당도 환경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당 정책에 이를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주의와 경제투쟁을 넘어 명실상부한 진보정당, 정책정당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이는 반드시 받아 안아야 할 과제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환경운동은 민주노동당에서 단순한 보조적인 부분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영역과 대등하게 자리잡아야 할 영역인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의의

최근 들어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주요 화두는 ‘산별노조 건설’과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일 것이다. 특히 이 과제는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에 의해 변화된 노동운동의 지점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던 ‘파이의 원천’에 대하여 국내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면,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기업이 크게 만들어 나눠먹었던 파이의 원천은 다음 세 가지 수준에서 조달되었다. 첫째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둘째는 중소 하청업체 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셋째는 모든 노동자들의 협조로 전국적 범위에서 진행된 자연생태계(물, 공기, 숲, 산, 바다, 강, 개울 등) 파괴의 대가였다. 특히,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사이에 전투적 노동운동을 주도해왔던 대우조선, 현대중공업과 같은 대기업 현장에서는 90년대 초반 이후 자본 ‘합리화’ 과정 속에서 정규직 사원은 거의 채용하지 않고 비정규직 인력만 채용해왔다. 그 결과 정규직 노동자들은 고령화되어 가고 있고, 젊은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굴레에 매여있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착취구조를 극복하려면 개별적인 교섭구조, 한 사업장에 갇힌 노동자의 시각을 특징으로 하는 기업별 노조체계로는 대항할 수 없으며, 진정한 산별노조 건설이 필수적이다. 또한, 산별노조 체계는 노동운동이 노동조건 개선에만 매달리지 않고, 좀더 자신의 시야를 확대하여 환경문제, 교육문제, 제3세계 문제, 통일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따라서, 환경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산별노조의 건설과 비정규직 철폐의 과제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과학기술의 지배에 맞서는 연대투쟁

21세기에 더욱 그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방치되고 있는 운동들은 핵발전을 비롯한 에너지 문제와 유전자조작을 중심으로 한 생명공학 등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지배에 맞서는 운동은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그 맥락에서 운동을 펼쳐야 하며,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시급히 연대해야 할 지점이다. 특히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를 바탕으로 선도적인 문제제기와 행동주의에 입각한 과감한 정치적 실천이 필요하다.

첫째,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의 지배에 맞서는 운동은, 통제 받지 않는 사회 권력을 해체시켜 나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둘러싼 투쟁이 요구된다.

둘째, 이러한 이슈들은 현대 과학기술이 자연에 가하는 폭력이 극단에까지 이른 것들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핵분열은 자연의 가장 내밀한 ‘원자’까지 ‘침투’해서 충돌시키고 쪼개어버리는 것이며, 유전공학에서는 ‘유전자’를 잘게 잘랐다가 다시 이어서 변형 유전자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기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과학기술의 폭력성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필요하다.

셋째, 핵발전과 생명공학은 그동안 인류에게 장밋빛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제시해왔다. “무한한 꿈의 에너지원”, “인간복제를 통한 장생불사의 세계”.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과학기술을 움직이는 동인은 돈(자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실험실을 벗어나 거대 초국적자본과 손잡고 이윤추구의 도구로서 대규모로 발전해나간다. 그러므로 다국적기업과의 대결 역시 불가피하다.

넷째, 현대 과학기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철저하고 완전한 정복으로 지구적 규모의 생태 재앙의 불씨가 되고 있다. 지구를 방사능으로 뒤덮을 수 있고, 지구 생태계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 그만큼 절박한 사안이며, 따라서 대중적인 인식의 확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힘을 모아야 한다.

다섯째, 핵발전과 유전공학은 지구적 차원에서 남북갈등의 대표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서구에서 이미 사양산업이 된 핵산업의 이전 문제, 제3세계에 대한 생물종 해적질, 유전자조작 식품 및 농산물에 의한 농업체계와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국제적 연대 없이는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이슈들을 통해 국내와 국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활발한 연대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를 위해서 노동운동은 무엇보다 조합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환경운동은 생태친화적인 사회 체제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환경문제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환경문제의 계급적 차별성과 환경 정의의 문제이다. 슬럼가에서 더러운 공기와 오염된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에어콘이 설치된 교외의 쾌적한 주거지에서 값비싼 외제 생수를 마시는 ‘부르주아’에게 환경 오염과 파괴는 당장 심각한 생활상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환경운동에서도 몰가치적인 ‘객관’이나 ‘계급 중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환경운동의 대중화라는 이유로 노동운동의 ‘급진성’과 ‘과격성’을 멀리하려는 시도는 노동운동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본으로의 예속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자본에 포섭된 환경운동은 자본가들의 돈벌이를 보조하는 나팔수에 지나지 않는다.

환경문제를 외면하는 노동운동은 이익집단 운동으로 전락할 것이며, 노동계급과 어깨 걸지 않는 환경운동은 “나무를 꺾지 맙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맙시다” 같은 관제 자연보호 캠페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은 이념과 주체에 있어 상보관계를 맺어야 한다. 나아가 새로운 이념과 지속가능한 미래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