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가루, 기름 마시며 건강돌보기 엄두도 못내
(CBS연속기획)”손가락 없는 것이 대수냐”는 영세 철공소 노동자들

프린트 이메일 전송

관련 기사

– “15시간 뼈빠지게 일해도 쥐는 것은 쥐꼬리 월급”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최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국내 노동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세업체 노동자들은 아직도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명마저 위협받고 있다.

CBS 연속기획 ‘우리시대의 전태일, 영세노동자들의 삶과 희망’, 두번째 시간으로 소규모 철공소, 속칭 ‘마치코바’ 노동자들의 현실을 살펴본다.

영세사업장 노동환경을 점검하는 CBS 기획취재팀은 대표적인 소규모 철공소 밀집지역인 서울 문래동 일대를 찾아갔다.

성동구 성수동과 금천구 일대에도 철공소들이 밀집해 있지만 문래동이 규모나 역사로 볼 때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첨단 공업 단지의 등장과 경기 침체로 예전보다 규모는 줄긴 했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철공소 수백곳이 거칫 쇳소리를 내뿜고 있다.

문래동 철공소 거리는 그 역사가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기름때와 쇳밥, 전기톱과 프레스로 상징되는 위험한 노동환경은 나아진 것이 없다.

일제 때가지 거슬러가는 역사, 위험한 노동환경은 그대로

실제로 취재팀이 만난 40년 경력의 김모씨는 얼마 전 선반 작업 중 튀어 오른 쇳조각에 실명할 뻔 했다.

김씨는 눈썹 위 흉터를 내보인 뒤 “프레스 하는 사람은 손가락 한 두개 없는 사람들 많죠, 8,90% 정도”라며 “뭐가 대수냐”고 반문했다.

손가락이 잘리고, 팔다리가 기계에 말려 들어가도 법으로 정해진 안전장치조차 노동자들에게는 먼나라 얘기다.

한 노동자는 “영세업자기 때문에 시설 투자를 못한다”며 “집세도 못 버는데 그런 거 장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손가락 한두개 없는 것이 뭐가 대수냐”

현재 법으로는 보통 프레스나 절단기 같은 위험한 기계들은 자외선 안전장치가 붙도록 규정돼 있고, 따라서 각종 절단, 압착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기계에 부착돼 생산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안전장치의 경우 사람 손이 기계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동작이 멈추게 해서 사고를 방지한다.

그러나 영세 사업주들은 생산량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안전장치를 아예 없애고 기계를 돌리고 있다.

한 노동자는 “안전장치를 하면 동작이 느리다”며 “안전장치를 푼 상태에서 하면 생산량이 많이는 나온다”고 밝혔다.

생산량 늘리기 위해 안전장치 아예 없애고 기계 돌려

철공소 노동자들은 비좁은 작업환경 속에서 각종 위험한 기계들과 뒤섞여 일하고 있다.

제대로 된 환기시설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쇠를 잘라낼 때 뿌려지는 절삭유와 쇳가루는 고스란히 작업자의 코와 입으로 들어간다.

한 노동자는 “머신일 하는데 절삭유를 뿌리지만 안전장비나 그런 거 없이 하기 때문에 기름을 다 마신다”며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영세 철공소 노동자들은 3평 남짓 어둡고 탁한 공장 안에서 귀를 찢는 소음으로 난청에 시달리면서도 그나마 물량이 있어 기계가 돌아간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환기시설 없어 절삭유, 쇳가루 고스란히 마시기도

철공소를 비롯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4대보험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영세한 사업 규모에 다달이 월급주기도 벅찬 사업주들이 이런 복지수준을 감당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렇다보니 노동자들은 건강보험도 지역보험으로 가입할 수 밖에 없고 회사에서 비용을 대는 건강검진이란 엄두도 못낸다.

실제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을지언정 예방적 차원의 건강검진은 사치라는 반응이다.

두세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잠깐이라도 한 사람이 빠진다는 것은 일을 멈춘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 노동자는 “건강검진을 받느냐”고 묻자 “시간이 없어서 못 받았다”고 답했다.

영세 사업장에 시간도 없어 건강검진은 엄두도 못내

위험한 작업환경에 놓인 노동자들은 특수건강검진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일반 건강검진도 못받는 마당에 유해물질을 다루거나 오염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건강검진은 들어본 일도 없다는 반응이다.

영세사업장이 이처럼 노동자 건강의 사각지대로 부각되면서 민간에서 팔을 걷어붙였다.

영세업체 밀집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기구를 만들어 유해환경 노동자들을 위한 특수검진 사업에 나섰다.

문래동과 함께 서울시내 대표적인 영세업체 밀집지역인 성동구 성수동의 단체들과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성수동 식구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세노동자 70여명을 대상으로 특수건강검진을 실시하고 현재 그 결과를 분석 중이다.

이번 사업을 주도한 성동건강복지센터 정명섭 사무국장은 “개별 사업주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정부가 책임지지 않고 있다”며 “지역단위에서라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성수동 식구들’은 특히 이번 검진사업을 영세노동자 건강보장 체계의 본보기로 만들어 문래동 철공소 거리를 비롯한 전국 영세업체 밀집지역에 적용할 계획이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방치돼있는 수백만 영세노동자들을 업종이나 지역단위로 묶어서 지원하는 ‘발상의 전환’이 정부와 자치단체, 그리고 대기업 중심의 거대노조에게도 절실한 시점이다.

CBS사회부 정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