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구조조정’ 신규부서 만들어 해고대상자 격리

은행권에서 횡행…2~3명당 컴퓨터 한대, “우린 이곳을 ‘차별집합소’라 불러요”

새벽 5시, 조흥은행 이아무개 대리는 밤새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서울생활 벌써 20여일째, 적응할 때도 됐지만 마흔이 넘어 시작한 합숙생활이 몸에 맞을 리 없다. 이 대리의 방에는 그 외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6명이 함께 숙식을 하고 있다.

▲ 책상 위에 놓은 컴퓨터는 50여대. 2~3명의 직원들이 한 컴퓨터를 나눠서 쓴다. 전 팀원이 들어오는 오전과 오후에는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있어야 한다. ⓒ 매일노동뉴스

113명 일하는 공간에 컴퓨터는 50대뿐

이 대리가 묵고 있는 의정부 합숙소에서 서울 영등포 사무실까지는 1시간40분이 걸린다. 지난 2일 처음 사무실에 들어선 이 대리는 밀려드는 자괴감을 감출 수 없었다. 휑한 사무실에는 책상과 컴퓨터가 고작. 그나마 113명이 근무해야 할 공간에 컴퓨터 수는 50여대뿐이다.

“한마디로 나가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환경을 보니까 절대로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더군요.” 조흥은행 영등포지점 2층 신규고객영업팀 사무실에는 지난달 구조조정 과정에서 은행측의 명퇴를 거부한 직원 113명이 모여 근무를 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24일 ‘신규고객영업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출근시간은 9시30분, 하루 계획서를 제출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오후 5시30분이 돼야 사무실로 들어온다.

“우리는 여기를 ‘차별집합소’라고 불러요. 출퇴근체크기도 조흥은행에서 오직 여기밖에 없죠.” 이 대리의 말이다. 실제로 은행측은 오전 10시30분이 되면 ‘영업’을 하라고 나가라고 한단다. “어느날 조금 일찍 들어왔는데 문이 잠겨 있더라고요. 들어오지 말라는 거죠.” 권아무개 차장은 한숨을 지었다. 은행측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하루에 딱 두 번. 아침저녁으로 인사부 직원 2명이 사무실을 둘러보고 간다.

5시30분 전에는 사무실 들어오지도 말라

“부산에서 근무만 했던 제가 (서울에) 무슨 연고가 있겠습니까. 한달 목표액을 채워야 하는데, 한숨만 나오죠.” 은행은 이들 각자에게 한달 목표량을 부여했다. 목표량은 연봉과 비례했다. 즉, ‘나가라는데 안 나갔으니 밥값을 하라’는 얘기다.

연봉 6,500만원의 이 대리에게 은행측이 부여한 월간 목표액은 650만원. 신용카드의 경우 1장당 ‘5만원어치’ 일한 것으로 계산해준다. 물론 반드시 ‘신규고객’이어야 한다. 한달에 130장의 신용카드를 만들어와야 하는 셈.

목표액의 80%이상을 채우지 못하는 직원은 ‘D등급’을 받는다. 2개월 연속 D등급을 받는 직원은 6개월 이하의 대기발령을 받게 되며 월급은 50%로 삭감된다. 이들은 최근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전보구제신청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일과가 끝난 오후 6시30분. 신규고객영업팀 직원 5명이 소주잔을 기울인다.

“은행은 우리를 실적저조자, 무임승차자, 조직융화 저해자로 몰고 있어요. 수십년 동안 조직을 위해 일했던 우리가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죠? 뭐가 ‘명예’퇴직입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 하루의 일정이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다. ⓒ 매일노동뉴스

작년엔 상주고 올해에는 나가라니?

23년간 은행에서 일한 조아무개 차장은 지난해 실적우수자로 백두산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이날 모인 직원들 가운데에는 은행장 표창을 받은 사람도 있다고. 조 차장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며 “은행에서 몇억 주면서 나가라고 할 때 안 나간 것은 돈보다 ‘자존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행은 지난달 17일 구조조정을 하면서 희망퇴직 지원자에게는 월평균 임금의 20개월에 해당되는 기본특별 퇴직금과 직급별로 차등 지급되는 4~6개월의 우대특별퇴직금을 지급했다.

이들이 적게는 1억이 넘는 퇴직금을 거부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기 당하기 가장 쉬운 직업이 뭔지 아세요? 선생님이랑 은행원이에요. ‘현금’속에서 일하다 보니까 제일 강조되는 덕목이 ‘도덕성’이죠. 퇴직금 받고 나간 직원 중에 잘됐다는 사람 한명도 못 봤어요.” 은행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하나. ‘해도 해도 너무한’ 은행의 방침 때문이다. 그리고 은행쪽의 전보발령이 ‘불법’이기에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도 없지 않다.

“신규고객영업팀 중에는 별정직도 15명 있어요. 수십년 동안 높으신 분들 운전기사한 양반들한테 고작 2주 연수시키고 영업하라고 내보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한달 동안 천만원 가까이 영업을 합니까?” 자신들 걱정에 동료들 걱정까지 얹혔다. “지노위에 부당전보구제신청을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본다”는 게 이들의 기대.

▲ 팀원들은 출퇴근시에 자신의 카드를 갖고 출퇴근 체크기에 기록한다. ⓒ 매일노동뉴스

‘내일’을 위해 ‘내 일’을 지킨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이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모멸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도중에 정아무개 차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정 차장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자리에서 뜨며 통화를 계속한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장모님이야, 걱정돼서 전화하셨대”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용해진 자리에 소주잔만 두어순배 돌았다. “제일 딱한 게 지방에서 올라온 여직원들이죠. 우리야 남자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아이들이랑 같이 있어야 할 엄마가 서울 올라와서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은행이 가정을 파괴하고 있는 거에요.” 길지 않은 술자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의정부 합숙소로, 나머지 세사람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일’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내일’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하루다. 하지만 수십년 달아온 양복 왼쪽깃 은행 배지에 박힌 그들의 ‘자존심’은 쉽게 주저앉을 수 없다는 ‘투지’를 만들어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섬에 있어요. 조흥은행 안에 있는 외딴 섬. 많이 외롭고 불안한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나갈 겁니다. 우린 믿어요.”

신종 사직수단 특수영업팀
노조, “원직복귀 위해 최선 다할 것”
조흥은행 신규고객영업팀의 경우와 같이 최근 들어 은행이 구조조정을 위해 임시조직을 만들어 퇴직 대상자들을 압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난해 10월 외환은행은 명예퇴직 신청인원이 기대에 못 미치자 200여명의 직원을 특수영업팀으로 발령냈다.

두 은행의 공통점은 직원들에게 불가능한 영업목표를 제시하고 이에 못 미칠 경우 불이익 조치를 주겠다는 것.
외환은행의 경우 모기지론 대출이 한 점포당 월 평균 1억2천만원, 외주 대출상담사가 1인당 월 2억9천만원임에도 특수영업팀 직원들에게는 1인당 월 10억3천만원의 실적을 요구했다.

신용카드의 경우에도 1점포당 모집 실적이 월 32장이고 전문 카드상담사가 월 39장임에도 이들에게는 1인당 109장을 목표로 제시했다.

노조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임시조직이 직원들의 사직 압박을 위해 급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실제 노조는 이러한 임시조직이 없을 경우 은행측이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실제 신청자가 반으로 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조흥노조 반봉진 노사대책부장은 “신규고객영업팀은 이후 은행이 또다시 강제적인 퇴직을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며 “최대한 직원들이 원직복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흥노조는 지난 대의원대회에서 강제퇴직을 거부한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당해고와 관련해 소송이 벌어질 경우 소송 기간 동안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외환은행의 경우 지난 16일 열린 부당전보구제신청에 대한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 자리에서 특수영업팀에 대해 급여상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과 신규채용에 앞서 특수영업팀 인력을 우선 활용할 것을 약속했다.

노조 김지성 위원장은 “이는 사실상 특수영업팀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은행은 특수영업팀 운영을 포기하고 소속 직원들을 복귀발령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은호 기자 bankol@labortoday.co.kr

2005-03-21 오전 9:41:23 입력 ⓒ매일노동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