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산재(産災) 사망 한해 3000명인데 …
[중앙일보 2005-04-17 20:57]
[중앙일보 선한승] 최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복귀로 노사정 간에 사회적 대화의 훈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 정작 화급하게 다뤄야 할 중대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화급한 현안이 산업재해다.
산업안전사고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1년에 300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 산재 사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며, 특히 산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 비해 20배나 많다.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스페인의 1.5배다. 산업재해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노사 분규보다 5배 많고, 경제손실액은 40배에 이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 산재 통계가 엉터리인데 지금까지 노동행정의 목표는 산업재해율 감소라는 숫자놀음에 빠져 있다. 산업재해율이 동종산업 평균보다 높은 사업장은 국가 발주 관급공사의 입찰자격을 박탈하고 산재 다발 사업장으로 고지해 과징금을 때리니 산업안전사고를 제대로 고지할 턱이 없다. 현재와 같은 산재 통계 방식이 계속되는 한 산재 은폐는 없어지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산재보험료를 납부하고도 공상으로 처리해 산재보험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얼마 전 태국 여성노동자가 노말핵산에 중독돼 다발성신경증후근(앉은뱅이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출국했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글로벌 시대, 국가 간 인력이 자유로이 이동하는 추세에 따라 이제 산업재해는 국제문제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인권을 무시하는 국가의 제품을 국제거래에서 불이익을 주는 소위 블루라운드를 국제규범화할 태세다. 산업안전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인권이다.
정부나 노사 모두 산업안전 문제를 초미의 과제로 삼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개혁해야 하나.
첫째, 산업재해의 양극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 대기업 노조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사업장에는 소위 나이롱환자로 몸살을 앓는 반면 영세사업장은 산재사고를 당하고도 해고의 위험성 때문에 고통을 참아가면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다. 외국인 노동자.여성.중고령자.협력업체 노동자 등 산재 취약 노동자를 위한 전문 산재예방센터가 필요하다.
둘째, 노동행정의 기본이 되는 산재 통계 개선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산재사고 자진 성실신고 업체의 경우 최소한 중복규제는 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산재 예방과 보상은 통합돼야 한다. 지금같이 산재 예방의 산업안전공단과 산재 보상의 근로복지공단 간에 산업안전 업무가 나뉘어선 업무의 비효율성과 예산 낭비가 불가피하다.
넷째, 정부가 가장 폼 나는 사업으로 내세우는 3D-클린사업은 엄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이 납부하는 산재기금이 주로 사용되는 용처가 고작 책걸상.전조등.환풍기 교체에 집중돼 있는 문제와 정작 지원해야 할 열악한 사업장은 자격 미비로 탈락하는 문제는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다섯째, 산업안전 보건 문제는 노사 모두 상생하는 주제다. 노동계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지 자문해 보기를 바란다. 기업도 산업안전 보건 책임자를 명퇴 대상자가 마지막에 가는 한직으로 치부하는 행태부터 바꿔야 한다.
노동부는 정부혁신위가 산업안전TF를 꾸리자 기획단을 만들어 올해 산업안전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나섰다. 과거에도 비슷한 기획단을 여러 번 만들었으나 부처 이기주의라는 벽에 부닥쳐 미봉책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유관기관 및 사회단체의 업무 협조 체제부터 구축해야 한다.
산업재해 왕국이라는 불명예로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은 공염불이나 다름없다.
선한승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