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문제와 거짓말

비정규직 문제와 거짓말

[한겨레 2005-05-02 20:24]

[한겨레]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가장 흔한 오해는 그것이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통계청이 임시·일용직을 따로 집계하기 시작한 1989년부터 96년 사이 임시·일용직 노동자 비율은 평균 43%였다. 이후 지난해까지 8년 동안은 49%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6%포인트 가량 높아지긴 했지만, 그 전에도 매우 높았던 것이다. 90년의 45%와 지난해의 48%만 견줘보면 그 차이가 3%포인트에 불과할 정도다.

물론 임시·일용직 외의 비정규직도 상당수 있지만, 역사적 궤적을 따져볼 수 있는 자료는 그것뿐이다. 왜 우리나라엔 비정규직 비율이 예전부터 그렇게 높았을까? ‘연공임금-종신고용’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성과에 따른 보상’이란 원칙에서 보면 연공임금제는 불합리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도 나름의 합리성이 담겨 있다. 직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사람의 생애에서 노동력은 대체로 40살을 전후해 최고에 이르고 그 이후에는 떨어진다고 한다. 연공제는 젊은 시절에는 성과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하는 대신, 나이 들어 돈을 많이 필요로 할 때 성과 이상의 임금을 주는 방식이다. 일종의 후불제이므로 종신고용을 전제로 해야 한다. 기업들이 숙련 노동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경쟁하던 시대에는 이런 보상체제가 무리 없이 작동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모든 노동자를 이런 제도틀 안에 둔 것은 아니었다. 경기변동에 따른 유연한 대응이 어렵고, 성과가 기대에 못미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광범한 비정규직의 존재는 기업들이 연공임금-종신고용 시스템의 보완장치로 비정규직을 오래 전부터 활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이었던 대기업에까지 빠르게 확산됐다.

주목할 것은 정규직에서 밀려난 주요 대상이 고령 노동자,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단순직무 종사자들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연공임금제를 적용해서 기업 쪽에 유리할 것이 결코 없는 이들이다. 기업들은 이런 변화를 ‘성과에 따른 보상’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큰틀에서 보면 기업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다. 성과에 따른 임금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라면 성과에 비해 덜 받던 이들에 대한 보상은 늘려야 한다. 하지만 임금수준이 올라간 노동자는 극히 일부이고,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수준은 경제가 성장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때그때 성과에 따라 임금을 받는 시스템으로의 대전환을 노동자들이 막을 명분이 과연 있느냐는 점이다. 제조업은 위축되고 지식산업이 성장하면서 노동자 개인의 성과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급변하는 기술환경도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를 흘러간 옛노래로 만들고 있다. 개별 노동자 사이의 성과 차이, 그로 인한 보상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이제 노동자들도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되었다.

대규모 제조업체에는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면서도 절반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 이른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가장 악질적인 노동착취이고, 정규직화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불법고용 문제에 가깝지, 비정규직 일반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상당수 비정규직은 ‘연공임금-종신고용’ 제도를 지키려는 노동자들과 성과만큼만 임금을 주겠다는 기업들 사이의 싸움 과정에서 공중에 던져진 이들이다. 고용이 불안한 것은 물론, 넘쳐나는 공급 때문에 성과만큼의 임금조차도 못 받는 이중고를 겪는다. 성과 차이에 따른 보상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이룰 방법은 없을까? 비정규직 문제를 풀고, 노동자의 지위를 높이려는 이들에게 던져진 풀기 어려운 과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