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총은 CSR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IMF 경제위기 직후인 98년에 독일에서 노조 정책 담당으로 일하는 간호사 한 분이 독일의 비정규직 사정을 설명하러 한국에 왔다. 한국의 노조 간부들은 독일은 어떻게 비정규직을 철폐했냐고 물었다.

그런데 독일 간호사는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비정규직을 왜 철폐해요. 그러면 우리처럼 아이를 키우면서 일해야 하는 아줌마들은 어떻게 직장을 다닐 수 있겠어요?”라고 의아해 했다. 이 대답을 들은 한국의 노조 간부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이 사람 노조 간부 맞아’ 하는 눈치로 “그럼 당신도 비정규직이냐”고 물었다. 독일 간호사가 대답했다. “그렇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상식”

이 독일 간호사는 이틀에 하루 꼴로 병원에 나가 한 주에 12~16시간을 일한다고 했다. 물론 절대 비교했을 때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정규직보다 급여도 작고, 기업이 제공하는 복지 수준도 낮다. 하지만 상대 비교, 즉 시간 단위로 따지면 사회복지는 물론이고, 급여나 기업복지 수준에서 차이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같은 일에서 정규직이 1시간 일해서 1만원을 받으면 비정규직도 1시간을 일해서 1만원을 받으며, 기업 복지도 비례해서 적용된다는 얘기였다. “동일한 시간을 일한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돌아가는 급여와 혜택이 동일한 게 당연하다. 절대액으론 급여가 작지만, 아이들과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비정규직을 택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노조 간부들이 한국의 비정규직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자기 사업장에 꼭 필요한 인력임에도 정규직 일자리를 줄이는 대신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그것도 직접고용이 아니라 파견, 외주,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하는 걸 선호한다. 그러면 임금을 절반 이하로 깎을 수 있고, 사회보험 부담도 떠넘길 수 있다.”

차별 철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핵심

이번에는 독일 간호사가 의아해했다. “기업의 주인은 사용자뿐만 아니라 노동자 그리고 지역 주민들인데 어떻게 사용자가 노조나 지역사회와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더군다나 아무리 간접고용된 비정규직이라지만 이전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 어떻게 대폭 삭감된 임금을 줄 수 있느냐. 노조는 무엇을 하느냐”며 이번에는 그쪽에서 ‘당신들 노조 간부 맞아’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CSR,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다. 물론 우리 노조 간부들은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인권·노동권의 준수, 환경보호 그리고 투명경영과 고용창출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핵심내용”이라며 “노동법이나 단체협약이 법적 이행 의무를 지닌 강제적인 틀이라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자발성을 가진 일종의 신사협정 같은 것으로 독일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선 중요한 기업 가치로 여긴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삼성, 현대, 대우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다국적기업이 많은데, 노동법이나 단체협약으로 강제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할 때 한국의 사용자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차별을 할 수 있으며, 정부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허용할 수 있느냐는 게 그녀가 던진 마지막 질문이었다.

기업, 사적 소유물이 아닌 사회적 제도

요즘 반부패협약, 투명경영 유행 속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란 말이 유행이다. CSR의 핵심 정신은 기업이 자본가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사용자·노동자·지역주민 등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함께 만들어온 사회적 제도라는 데 있다. 이윤 추구가 다가 아니라 기업이 돈벌이에 앞서 노동권을 준수하고 인권과 환경권을 증진하며, 안정된 고용형태를 창출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10여 년 전 서구에서 논의가 시작돼 이제는 하나의 기업 관행으로 자리 잡은 CSR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핵심 정신은 실종된 채 기업의 이미지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정신이 부족한 우리 기업인들의 행태 때문인데, 특히 사용자 대표단체인 경총이 비정규법안 관련 국회 노사정 협상에서 보인 태도를 보면 헌법이나 노동법의 기본정신은 물론이고, 자기 회원사들이 앞장서고 있는 CSR의 가치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이 앞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례를 접하고 싶은 것은 필자만의 바람일까.

윤효원 국제담당 객원기자

2005-05-04 오전 9:08:3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