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띠 다시 잇는 ‘연대’의 띠
23일 오후 구로동맹파업 20주년 순례에 나선 50여명 노동자들의 마지막코스. 서울 금천구 가산동 ‘하이텍알씨디코리아’로 접어들자 공장정문 경비실에 금속연맹 선정1호 ‘노조탄압공장’이란 빨간색 글씨가 일행을 맞이한다.
감시와 차별, 폭언과 폭행, 해고, 노조탄압, 정신질환 산재불인정…. 13명 노조원들의 4년여에 걸친 힘겹고 고단한 투쟁은 공장 곳곳에서 읽힌다. 후줄근한 단층건물, 밀대걸레가 걸쳐져 있는 노조사무실 벽에는 ‘부당해고 박살내자’는 문구가 박혀있다. 색 바랜 농성천막은 지난 큰 비에 무너져 내렸고, 이제 창고로서의 역할도 못할 판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주저앉아 굴종을 선택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걸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노조 사무실 앞, 줄지어 늘어선 살구나무 사이사이를 잇는 색 바랜 띠들. ‘CCTV 감시’ 그림과 ‘원직복직 쟁취’ 등 각종 요구와 희망들이 담겨 있다. 85년 구로동맹파업, 그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노동자들은 빛바랜 띠들 사이사이로 색색의 띠를 다시 수놓았다. 새롭게 걸쳐진 소원지에는 ‘노조탄압 중단하라!’ ‘산재신청 인정하라!’ 등이 보태졌다.
고종환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힘내라’며 성금을 전달했고, 김혜진 금속연맹 하이텍노조 지회장은 모처럼 활짝 핀 꽃이 되어 웃는다. 하이텍 노동자 등 장기투쟁 사업장의 싸움은 힘겹고, 고단한 싸움만은 아니다.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의 빛이 소중하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현 기자 shlee@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