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텍 노동자 산재여부 다시 조사하라
[한겨레 2005-06-27 17:42]
[한겨레] 행정처분의 가장 기본 전제는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규명’ 이다.
근로복지공단은 무엇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불승인’이라는 처분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러고도 어떻게 자신들의 결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다.
지난 5월27일 근로복지공단은 회사의 노동자에 대한 감시, 차별, 통제로 ‘만성 적응장애’가 발생하여 요양을 신청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 13명에게 ‘요양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공단이 밝힌 불승인 사유는 ‘① 조합원들이 주장하는 차별, 감시, 통제 사실을 사업주가 적극적으로 부인하므로,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할 수 없었으며, ② 적응장애는 2002년도 직장폐쇄 이후에 발생한 노사갈등의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므로, 개별적 근로관계에서 기인한 업무상 재해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공단의 불승인 사유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기본 취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행정처리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그 절차와 사유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 조합원들은 3년이 넘는 동안 회사 주도로 이루어진 ‘조합원으로만 구성된 왕따 라인 설치, 조합원 라인에 대한 CCTV 감시, 관리자들의 부당한 감시통제, 조합원들에 대한 비조합원들의 집단적 따돌림, 외출·상여금·임금인상·야유회·식당사용 등 일상적 근로조건에 있어서의 차별’ 등을 주된 발병 사유로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명자료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공단은 단순히 ‘사용자가 이를 부인하고 있다’는 이유로, 발병 사유들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공단의 주장은 ‘사용자가 부인하므로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는 없지만 요양신청은 불승인’이라는 것인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결정이다.
행정처분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다.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없으면, ‘법률이나 규정의 적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단은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불승인’이라는 처분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러고도 어떻게 자신들의 결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다.
둘째, 공단은 ‘노사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인정되나, 이를 개별적 근로관계에서 비롯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다음의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 ① 산재보상보험법상 업무기인성에 대한 판단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업장 내에서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는 단순히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집단 따돌림 사건의 쟁점은 ‘실제로 집단 따돌림이 있었고 근로자가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 집단 따돌림이 왜 발생했는지’는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아니다. 따라서 집단 따돌림은 대부분 업무와 관계없는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지만, 실제 사업장에서 집단 따돌림이 존재했고 근로자에게 그로 인한 정신질환이 발생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2000.07.29, 2000재결 제664호, 2000.06.07, 서울행법 99구 21543 참조) ② 공단은 2003년 ‘청구성심병원 사건’이나 2005년 ‘문혜요양원 사건’에서, ‘노사 갈등에서 기인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적응장애가 발생하였다면 이는 업무상 재해’라고 밝히고 스스로 승인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노사 갈등에서 기인한 스트레스이므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사인과 사인 간의 법률관계에 있어서도 민법상 ‘금반언(禁反言)의 원칙’은 중요하게 인식된다. 그런데 책임 있는 공공행정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이 왜 말을 바꾸고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13명의 조합원들은 불승인 직후에 면담을 통하여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재검토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공단은 자신들의 결정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요청은 다시 승인을 내달라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조사과정을 바로잡아 제대로 된 조사를 다시 진행하라는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진정 노동자들을 위한 기관이라면, 형식적 법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의 눈물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단의 성의 있는 답변을 기대한다.
정종권/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