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리포트③-근골격계 질환]”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컷뉴스 2004-11-13 11:52
산재지정병원들이 근골격계 질환으로 입원한 노동자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CBS가 산업재해 지정병원의 진료기록 30개를 입수해 살펴본 결과 한마디로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근골격계 질환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한 대형병원의 차트를 살펴보자. 지난해 6월 응급실로 실려온 한 노동자의 경우 초진에서 ‘허리를 다쳤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 단 한 줄이 전부다. 그 뒤로 6개월동안 이 환자는 의사의 진찰없이 똑같은 약에 똑같은 물리치료만 반복해서 받았다.
산업의학 전문의인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은 “어떻게 하나같이 성의 없는 처방이 반복될 수 있는지 놀랍다”면서 “이렇게 치료해서 증상이 호전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혀를 찼다.
종합병원의 치료가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2년간 치료기록이 불과 반페이지
개인병원은 더 심각하다. 46살 김모씨의 차트는 지난해 12월 입원 당시 무릎관절 수술기록 뿐 그 뒤로 지금까지 매일 똑같은 처방을 의미하는 성의 없는 밑줄표시뿐이다. 그마저도 달랑 세 페이지가 전부다.
52살 유모씨 역시 지난 해 말 산재지정 개인병원에 입원한 뒤 병실에 방치되다 시피 누워만 있다.
디스크가 있다는 기록 이후로는 반복처방을 의미하는 ‘리피트(Repeat)’라는 단어만 차트를 가득 메이고 있다.
심지어 2년간 입원하고 있는 환자의 의료기록이 반 페이지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이 지경이니…”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CBS가 입수한 한 대기업 생산직에 종사하는 근골격계 질환자 30명의 의무기록 가운데 일부다. 이들은 직장 주변의 산재지정병원 네다섯 곳에서 주로 치료를 받고 있다.
대형병원 두 곳, 개인병원 두 곳에서 작성한 환자들의 차트를 보면 평균 7, 8개월 입원기간 대부분 이런 식으로 방치돼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치료 뒤 환자상태의 변화나 이에 따른 치료방법의 변경, 단순 물리치료 외에 재활치료 기록이 담긴 차트는 단 하나도 없다. 임상혁 소장은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제대로 된 재활치료 없이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더 안좋아지는 게 상식”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63%, 산재치료 효과없어’
실제로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최근 근골격계 질환자 119명을 조사한 결과 치료 뒤 증상이 나아졌다는 대답은 37%에 불과했다.
나머지 63%는 산재치료를 받고도 증상이 여전하거나 악화됐다는 얘기다.
평균 반년이 넘게 걸려 겨우 산재판정을 받은 근골격계 질환자들이 병원에 와서도 방치를 당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병을 키우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근골격계 환자들을 대하는 병원측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꾀병 아니냐’는 것이다.
부실진료 의혹을 받고 있는 한 병원 원무과 담당자는 “물리치료 말고는 별 다른 게 없다”면서 “근골격계 질환 자체가 만성 질환인데 차도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노동계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산재보험료만을 노리고 치료 장기화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임상혁 소장은 “병원들이 이렇다할 치료도 하지 않으면서 입원기간만 늘려서 보험료를 챙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산재치료 체계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일부 근골격계 질환자들의 경우 아예 치료받기를 꺼리는 일도 있다.
노동당국, “의사 선생님들이 하시는 일인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엉터리 진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전문가가 차트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감독 당국은 의사의 판단이 옳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문제가 된 병원들을 관할하는 근로복지공단 지사측은 “주치의의 의학적 행위라든가 소견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할 수 없으며, 의사들이 물리치료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행동할 때는 달리 제제할 방법이 없다”고 변명했다.
산재 보험료를 지급하면서도 어떻게 쓰이는 지 알바 아니라는 식의 태도가 부실치료를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동계, 노동강도 완화와 작업환경 개선투쟁 경고
노동계는 이처럼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처리 과정이 총체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만큼 더 이상 투쟁을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우선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처리 범위를 축소하기 위한 정부의 ‘처리지침안’ 철폐를 위해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강경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공투위 주최의 12일 토론회에서는 특히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노동강도를 완화하고 작업여건을 개선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부실한 근골격계 산재치료 문제가 작업체계 전반에 대한 노동자들의 개선 요구로 확산되면서 향후 노사관계의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