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의 일본 이야기
“저항이 없으면 안전도 없다”
42년 전의 미이케탄광 탄진폭발사고의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지난 주말 일본에서 온 ‘미이케(三池) 탄진 폭발사건 연구회’ 분들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탄광지대인 태백을 방문했다. 태백에서는 산재보험법 상의 보상을 못 받고 있는 소위 ‘재가 진폐환자’와의 교류와 대안적인 지역 만들기를 위해 정책제안을 하는 단체와의 의견교환, 장성광업소 채탄 현장 견학 등 흥미 깊은 방문이었다.
‘미쓰이(三井) 광산 미이케(三池) 탄광’은 일본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이번 ‘미이케 연구회’가 태백에 있는 사람들과 교훈을 나누려고 한 부분을 전하고자 한다.
미이케탄광 탄진 폭발사건 연구회
▲ 스즈키 아키라. 스즈키 아키라(44)씨는 지난 90년부터 일본에서 산재추방운동을 해 온 활동가다. 93년 과로사와 원진레이온 문제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 한국의 산재 및 노동안전단체와 교류하다가 97년부터 한국에 머물면서 어학연수를 했고 2002년부터 노동건강연대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일본 최대 탄광이었던 미이케탄광에서 1963년 탄진 폭발사고가 일어나 458명이 사망하고 839명이 일산화탄소(CO)중독에 걸렸다. 사고 직후 의사, 변호사, 연구자들이 ‘CO연구회’를 결성하여 사고 원인, CO 중독자와 가족문제, 민사재판에 관한 자료수집과 분석을 해 왔다.
민사재판은 93년 기업책임을 인정해 승소하였다. 미이케탄광은 1997년에 108년의 역사를 마치고 폐광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에서는 탄광사고가 반복되고 있으며 진폐증환자 문제는 아직도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일본의 ‘부의 유산’인 교훈을 살리기 위해 아시아와의 정보교환, 사례연구, 인적 교류를 목적으로 ‘CO연구회’를 새롭게 조직한 것이 ‘미이케 연구회’이다.
일본 최대 탄광 – 미쓰이광산 미이케탄광
1889년 미쓰이자본에 의한 탄광경영이 시작되었다. 미쓰이광산의 착취 구조는 일제시대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1930년대까지 수많은 죄수를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패전 때에는 미이케탄광에는 강제연행된 한국인 2,297명이 있었다는 통계도 있다.
그 미이케탄광에서 노동조합이 46년에 결성된다. 전쟁 당시 ‘산업보국회’ 위원이 준비하고 회사가 지원하는 어용노조로 출발했다.
계속되는 인원정리 = 해고, 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 상승에도 인상이 없는 임금, 강제 저금, 생산량 인상. 그 때까지 ‘남자는 돼지’라고 불리웠던 노조가 52년 처음 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전쟁 정세 아래 정부가 개입하여 긴급조정령을 발동해 파업은 63일만에 중지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노조는 자본의 구조조정 공격에 대비하여 1) 독자적으로도 투쟁할 수 있는 조직 건설, 2) 간부투쟁으로부터 대중투쟁을 기본으로, 3) 직장조직뿐만 아니라 거주지에 지역분회나 주부회 건설이라는 활동에 착수했다.
“영웅 없는 113일 투쟁”으로 승리
1953년 일본정부는 ‘파업 규제법’으로 탄광과 전력 파업을 규제했다. 이 파업규제법이 공포된 8월7일, 회사는 5,738명을 지명해고 했다. 이에 대해 미이케노조는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노조는 부분파업을 전술로 채용했다. 석탄을 지상으로 운반하는 벨트에 종사하는 노동자 몇명을 지명하면서 파업을 전개하고 전면파업과 같은 효과를 얻었다. 직장 부처마다의 요구투쟁, 주부회 시위 등을 벌이고 113일 동안 끝까지 싸운 1,825명이 해고철회 및 직장복귀를 쟁취했다. 이 파업은 모든 노동자의 힘으로 쟁취했다는 뜻으로 ‘영웅 없는 113일 투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장노동자에 의한 대중투쟁은 여러 성과를 올렸다. 임금대상 노동시간을 갱구 입구부터 출구까지로 쟁취하고 노조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노조는 성과제 시정, 하청·청부 노동자의 노조 조직화 등을 쟁취하면서 안전우선을 협약에 명시시켰다. 안전투쟁은 연 평균 사망자 29명, 부상자 2,361명이었던 사업장을 59년 사망자 1명까지 줄이고 ‘노동과 살 권리’를 수립하여 일본 최강 노조에 마아케노조를 형성했다.
“총자본과 총노동의 투쟁” 미이케 투쟁
1960년 “총자본과 총노동의 투쟁”이라고 표현되는 전후 최대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석탄으로부터 석유로 에너지정책 전환을 꾀한 자본은 ‘석탄산업 구조조정 = 10만명 삭감’을 내세웠다. 석탄산업 노조인 탄광노동조합 산하 미이케탄광노동조합은 최강 노조로 자본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거기에 노총인 총평이 조직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일본 역사상 최대 쟁의가 되었다.
1959년 12월10일 미쓰이자본은 노조 할동가 중심으로 1,278명 지명해고 공격을 시작하여, 미이케노조는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일본 경제계의 지원을 받아 회사는 직장폐쇄를 취했다.
1960년 3월에는 회사가 은밀하게 육성한 제2노조가 결성되었다. 제2노조를 이용하고 생산을 재개한 회사와 저탄장을 점거하고 석탄수송을 저지하는 미이케노조와의 긴장은 공권력 도입-유혈사태가 예측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미이케노조는 회사가 사용한 폭력배에 의해 노합원 1명을 잃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중노위 직권알선을 내기로 했다. 알선안은 “해고는 철회, 해당자는 정리기간 만료와 동시에 자발적으로 퇴직”이라는 전면적인 노조 패배안이었다. 노총인 총평과 상부조직인 탄광노조가 알선을 받아들이는 것을 결정해 무기한 파업투쟁은 313일만에 종결되었다.
미이케탄광 탄진 폭발사고
미이케투쟁에 승리한 미쓰이자본은 관리직 권한 강화, 노동시간 연장과 작업량 인상, 용역 도입을 실시하여 보안투쟁을 통해 쟁취한 보안요원을 삭감했다.
사고가 난 미카와 갱에서는 12명이던 보안요원이 2명으로 줄었다. 채굴한 석탄은 벨트로 지상으로 운반된다. 벨트 주변에서는 석탄 분진이 비산하기 쉽고 탄진폭발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위해 탄진 제거나 물뿌리기를 해야 하는데 그 요원을 없애버렸다.
64년 총평 중앙은 전국활동자회의를 개최하여 산재 직업병투쟁 구호로 “저항이 없으면 안전이 없다”를 채택했다. 그때부터 “안전이 없으면 노동이 없다”와 함께 노동안전할동의 표어가 된 이 말은 미이케 탄진폭발사고의 쓰라린 아픔을 안고 있다.
CO중독과 산재보상
사고에 의해 생긴 CO중독 재해노동자에 대한 산재보상은 아주 기계적인 것이었다. 장기요양환자에 대한 요양 강제종결에 항의하여, 노조와 가족들의 투쟁은 특별법제정으로 계속 요양을 쟁취했지만 가족의 고통은 보상되지 않았다.
CO중독은 두통이나 건망증 같은 자각증상과 함께 지적 장애도 동반한다. 사람이 변한 아빠를 안고 살아야 하는 가족의 고통에 대해서는 민사재판에서도 인정되지 않았다. 손, 발에 떨림이 없다는 이유로 CO중독자로 인정되지 않는 사례도 있고 직업병인정제도나 기준에 대한 개선노력도 이루어졌다.
지역에 연대를 찾은 미이케노조
탄진 폭발사건부터 40년이나 지났다. 탄광은 폐광이 되고 CO중독증 환자만 남았다. 산업이 사라진 탄광지역에서는 지금 새로 지역만들기가 시도되고 있지만 미이케 연구회는 CO환자를 배제한 지역개발은 안 된다고 한다.
생산제일주의로 안전을 소홀한 미쓰이자본의 자세는 지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미이케노조는 사고가 난 11월9일을 ‘미이케노동자 굴욕의 날’로 정했다. 노동권을 둘러싼 노사 대결에서 노동자가 패배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대재해라고 정리한 것이다. 미이케노조는 이후 CO중독환자 구제에 적극 나서, 미나마타병을 내부고발한 치쏘노조를 지원하고, 댐건설-환경파괴에 대해 시민운동과 연대한 활동을 해 왔다.
미이케노조는 올해 4월 해산식을 했다. 최대 3만명이었던 조합원은 제2노조, 사무부문의 직원노조로 분열이 되었다. 노사 공조노선을 가는 제2노조에 비해 제1노조인 미이케노조는 여러가지로 차별을 당했다. 그러나 “활동을 통해 노동자 의식은 높아진다”(전 위원장)고 미이케노조는 계속 투쟁해 왔다.
당시 미이케노조가 추구한 용역, 하청노동자까지 노조에 조직하고 안전을 확보한 실천은 현재도 아직 유용한 활동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스즈키 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