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 전기용접·태풍속 고공공사…찢긴 안전망 사이 ‘목숨 건 곡예’
노동재해 왕국 멍에를 벗자
①멈추지 않는 죽음의 행렬

▲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 학교 신축공사 현장에서 건설 노동자들이 얼기설기 묶인 쇠파이프에 의지한채 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안전망이나 발판도 없는 비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외벽공사에 벌이고 있다. 성남/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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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에선 2828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초대형 사업장’ 노동자 전체에 해당하는 수다. 하루에 8명 꼴이다. ‘삶의 질을 따지는 시대’라는 말이 공허하다. 모든 산업재해는 ‘억울한’ 죽음이며 상처다. 적절한 예방 조처와 제도만 있다면, 일하다 삶을 마감할 이유가 없다. 성장 지상주의의 ‘유령’이 끈질기게 배회하고 있는 ‘산재 왕국’의 모습과 극복 방안을 살펴 매주 1~2차례씩 싣는다.

태풍 ‘나비’가 강습한 지난 6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한 학교 신축공사 현장. 초속 7~8m의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지만 이곳에선 목숨을 건 ‘곡예’가 이어졌다. 러닝셔츠 차림에 헬멧만 쓴 노동자 두 사람이 얼기설기 묶인 지름 4㎝ 안팎의 쇠파이프에 두 발을 고정했다. 높이는 지상 8층. 이들은 안전망이나 발판도 없는 비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외벽 공사에 정신이 없었다. 건물 벽에 매달려 고된 ‘삶의 밧줄’을 붙들고 있는 이들은 이런 ‘죽음의 곡예’를 날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옆 8층짜리 기숙사 공사 현장에도 노동자 7~8명이 안전모도 없이 1층 외벽에 달라붙어 외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긴 채 3층부터 걸쳐 있는 안전망은 금방이라도 아래로 덮칠 듯했다. ‘무재해’와 ‘산업안전’을 외치는 현장 곳곳의 각종 깃발과 펼침막은 그저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비가 내리던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ㅌ건설 아파트 현장. 난간도 없는 25층에서는 노동자 두 사람이 자재를 모아 70m 아래 1층으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건물 바깥쪽에 4층부터 14층까지 난간이 촘촘히 설치됐지만, 모두 이동식으로, 무거운 짐을 나르던 노동자가 넘어지면 ‘추락’은 뻔했다. 현장 노동자 박천(34)씨는 “자재를 내리려면 난간을 치워야 돼요. 위험하고 무섭지만 어쩌겠어요”라며 체념했다.

건설현장에서는 각종 추락과 붕괴, 낙하 사고 등으로 한 해 평균 8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숨지고 있다. 이런 죽음들은 대부분 ‘재수가 없어 생긴 불상사’로 치부된다. 같은 현장에서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되는 대표적 이유다. ▶관련기사 6면

실제 올해 2월21일 대구시 수성구 한 주상복합건물 공사현장에서는 김아무개(53)씨가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높이 4., 폭 6m 가량의 유로폼(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일종의 거푸집)에 깔려 숨졌다. 강도가 떨어지는 철선으로 유로폼을 매단 때문이다. 며칠 뒤 또다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철근이 덮쳐 철근 반장 이아무개(32)씨가 숨졌다.

안전을 도외시하는 사용자나 관리자에게 작업을 강요당하다 목숨을 잃는 일도 다반사다. 대구시 수성문화예술회관 신축공사를 벌이던 ㄷ건설은 지난달 6일 공사 중 출토된 유물을 발굴하느라 땅을 파헤쳤다가 다시 메운 곳에서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벌였다. 이날 시간당 최고 60㎜의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 때문에 지반 붕괴가 우려됐으나, ‘레미콘 차에 남아 있는 콘크리트가 아깝다’는 이유로 무시됐다. 결국 오후 3시께 지반이 무너졌다. 그 위에서 작업하던 육중한 펌프카에 매달린 장비가 흔들리며 하청노동자 정아무개(29)씨가 머리를 맞고 숨졌다.

자동차·조선 등 중공업 사업장 등에서 재래형 노동재해도 여전하다. 지난해 노동자 4명이 노동재해로 숨진 현대중공업에선 올 7월20일 정아무개(41)씨가 가로 5.7m, 세로 1.7m짜리 철판을 옮기다 크레인과 철판자동절단기 사이에 끼여 숨졌다. 20여일 전 6월30일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선 백아무개(34)씨가 전동지게차에서 떨어진 철제부품 적재함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최명선 건설연맹 산업안전부장은 “산재사고의 50%가 건설현장인데, 엉터리 정부 통계로만 따져도 1989년부터 2004년까지 건설현장에서 숨진 이가 1만명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그는 “건설현장 사고에서 40%가 넘는 추락과 낙하는 안전설비만 신경쓰면 대부분 예방할 수 있지만, 다단계 하도급 관행 때문에 돈만 아끼려다 이런 후진국형 안전사고가 계속된다”며 “우리나라는 12미터마다 추락망을 설치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층마다 추락망을 설치해 자살하기도 어렵다”고 꼬집었다. 특별취재팀 ysw@hani.co.kr

특별취재팀=양상우 김기성 정대하 김양중 기자, 박수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