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험, 특수고용직·새 직업병에 ‘높은 벽’
노동재해 왕국 멍에를 벗자 ⑤ ‘구멍뚫린 사회안전망’ 산재보험
▲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산재의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중인 진폐환자들이 지난달 13일 진폐환자에 대한 산재혜택 확대를 요구하는 상경시위를 의논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노동부가 추진중인 ‘진폐환자의 요양관리 실태 및 합병증 인정범위에 관한 고찰’ 연구용역이 진폐환자에 대한 처우를 축소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태백/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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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던 딸이 호흡곤란으로 사흘 만에 갑자기 죽었어요. 4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하면서 식사도 제 때 챙겨 먹지 못하며 죽어라 고생만 하다가…”
학습지 교사·보험모집인 등 혜택 못받아
보험적용돼도 보상 턱없이 환자부담 커
학습지 교사로 일하던 딸 이정현(당시 28살)씨를 지난해 4월 저세상으로 보낸, 유숙자(60·울산시 동구 서부동)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유씨는 ‘당연한 권리’라는 주위 사람들을 말에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례비용을 신청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정연씨는 노동자가 아니어서 산재보험 혜택의 대상이 아니다”는 대답이 날아왔다. 유씨는 “다른 것은 몰라도, 날마다 실적에 쫓기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힘든 노동을 하던 딸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며 기가 막혀했다. 유씨는 노동부, 근로복지공단 등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하고 따지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당시 공단 쪽은 이정현씨의 죽음에 대해 “이씨가 설사 노동자라 해도 근무 형태로 볼 때 과로사로 보기 힘들다”고 밝혔다. 반면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쪽은 “이 교사의 사망은 과로에다 회사의 부당한 실적 강요로 생긴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인데도 공단은 이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은 이른바 특수고용직 노동자인 학습지 교사의 열악한 처우와 노동조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법정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법원도 학습지 교사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현행 법조항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노동건강연대 등 노동·시민 단체들은 성명을 내어 “법원이 굴뚝산업 시대의 노동자만을 생각한 시대착오적 판결을 내렸다”며 개탄했다. 이들 단체들은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해야할 근로복지공단이, 형식적인 법 논리를 내세우며 보호가 가장 절실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라 할지라도 이씨처럼 산재보험 적용 대상이 아닌 사람들은 비단 학습지 교사 뿐만이 아니다. 화물트럭 운전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보험모집인, 방송작가, 리포터 등과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처지이다. 특수 고용직이란 사용자가 노동자를 개인사업자 등록을 내는 방식으로 사업자화해서 일을 시키는 형태다. 이들은 현재 제도적으로 산재보험에서 차단돼 있다.
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가 보장된 경우에도, 산재보험이 제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대목은 산재보험의 여러 비급여 항목 때문에 보상이 불충분하게 이뤄지는 현실이다. 사용자가 사고에 대해 책임진다는 의미의 산재보험이므로 혜택 및 보장성이 건강보험보다 더 높아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박재우(53·부산시 덕포동)씨는 2002년 8월 공장 신축 공사 현장에서 가스폭발 사고로 온몸의 80%에 해당되는 피부 화상을 입었다. 거의 3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피부 이식 등의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피부 이식에서 사용되는, 2000만원이 넘는 인조 피부는 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환자 본인이 물어야 했다. 또 교수급 의사들의 특진비인 선택 진료비 등도 다 내야 했다. 급여의 70% 정도를 받는 휴업 급여와 산재 보상금을 털어 넣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결국 대출을 끼고 있던 집도 가압류를 당해야 했다. 평소 일용직으로 일을 하던 아내는 일을 그만 두고 남편의 간병에 매달려야 해서,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박씨는 “본인부담금 등을 회사에 요청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치료는커녕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고 한탄했다. 게다가 박씨는 이식된 피부에 문제가 생기면 또 치료를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는 정책국장은 “박씨와 같이 치료 비용을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들도 있다”며 “노동자들이 산재를 겪더라도 충분한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대책 마련이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떠오르는 직업병에 대한 산재 인정에 인색한 풍토도 노동자의 안전과 삶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재해를 입은 노동자들과 근로복지공단 사이에서, 산재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해마다 수천 건 이상 벌어지는 마찰에서도 이들 신종 직업병은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는 고용주의 폭언과 감시, 조합원 차별로 정신질환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원 13명의 천막농성 시위가 석 달 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5월, 노조원에 대한 사업주의 폭언, 감시, 조합원 차별 등으로 ‘불안과 우울 반응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가 발병했다며 산재 신청서를 냈다. 실제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여러 조사 끝에 해당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5월 말 이들에게는 전원 불승인 통보가 떨어졌다. 노조는 “노사간 마찰 등 비슷한 이유로 ‘적응장애’라는 정신질환을 판정받은 8명의 청구성심병원 노조원들은 2003년 전원 산재 승인을 받았다”며 “근로복지공단의 원칙 없는 산재 판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쪽은 같은 정신질환이라 할지라도 노사마찰기간 등이 다르며, 노사갈등 이외에 다른 만성적 적응장애를 일으킬 만한 충격은 없었던 점 등이 고려됐다고 밝혔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는 “아직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직업성 질환의 산재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앞으로 이런 마찰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 himtra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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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주들 산재 불이익 피하려 ‘공상’ 처리
산재 승인까지 한달이상…병원비 부담 치료포기도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보험) 제도의 문제점은 적용 대상은 물론 내용에도 제한이 많아 정작 노동재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겐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선, 2004년 현재 산재보험 적용대상은 1047만여명에 이른다. 양대 노총이 추정하는 전체 노동자 1500만명에 비춰보면 400여만명이 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화물트럭 운전자, 학습지 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과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아예 법과 제도적으로도 적용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은 적용 대상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적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 박영일 사무국장은 “여러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10~15% 정도가 산재보험 적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며 “이주노동자는 이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재해가 은폐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노동건강연대는 “이른바 ‘공상’이라는 형태로 은폐되는 노동재해 규모는 실제 발생된 전체 노동재해의 70~80%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공상은 회사 쪽에서 치료비, 보상금 등을 지불하면서 산재 처리를 하지 않은 경우다. 박 산재노협 사무국장은 “산재 발생에 따른 각종 불이익을 회피하려는 사업주의 이해 때문”이라며 “산재보험으로 처리되면 재활과 후유증 치료 및 휴업급여 등이 보장되지만, 공상은 그렇지 못해 결국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공상으로 처리되면 치료비에 대한 혜택을 건강보험에서 담당하므로,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왜곡을 가져온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노동재해를 입은 뒤 ‘산재 승인’까지 기간이 너무 긴 것도 제도적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통계를 보면, 사고성 재해의 경우 보통 37일 정도가 걸리며, 직업성 질환은 평균 98일 정도가 소요된다. 산재노협은 “산재로 인정되기까지 병원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재보험의 보장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노동자들을 이중으로 괴롭히는 점들이다. 치료를 받는 도중 노동자 본인이 내야 할 본인부담 비율이 너무 커서 치료를 포기하는 사례들도 많다. 또 노동재해를 입은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요양기간 중의 휴업급여가 불충분한 점도 미비점으로 지적된다.
재활과 직장복귀 시스템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박영일 사무국장은 “근로복지공단이 3군데 직업훈련원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제한된 인원에다 시대에 뒤떨어진 직업재활로 현실성 없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궁극적인 재활 및 복귀 프로그램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재 인정 가운데 논란이 큰 영역의 하나가 바로 직업성 질환의 인정 여부다. 노동자들의 처지에선 근골격계 질환, 과로사, 직무 스트레스 등은 직업과의 연관성을 명확히 밝히기가 쉽지 않다. 반면 이들 질환에 대한 인정 기준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게 노동건강관련 단체들의 얘기다.
특별취재팀 ys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