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입자의 ‘인체 침투’를 경계하라

[한국일보 2005-11-02 18:43:16]

원본 사진 보기

9월28~30일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국제 고분자 나노화합물 과학기술 심포지엄’에서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의 라케시 굽타(화학공학과) 교수는 경악할만한 연구내용을 발표했다. 미세한 나노 입자를 제조하는 생산자를 대상으로 한 검진에서 진폐증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진폐증은 석면, 탄광 내 유해분진, 미세먼지 등을 흡입해 폐에 염증이 생기고 폐 조직이 변형되는 질병으로, 별다른 치료법이 없는 심각한 질병이다.

굽타 교수의 발표는 나노 입자의 진폐증 유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어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국내 연구자들은 “정말 놀랍다” “나노 연구 함부로 하겠느냐”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에서 제기돼 온 나노 연구의 위험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노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실험실 수준에 머물고 있는 ‘미래 기술’이 아니다. 살균력이 뛰어난 은나노 섬유와 식기, 세탁기가 시판되고, 나노 입자의 기능성을 이용한 화장품도 판매되고 있다.

세계 나노산업은 2010년 1조 달러 규모로 추산되며, 올해 정부는 2,772억원의 연구비를 나노 기술 개발에 쏟아붓는다. 하지만 나노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선진국들은 이미 위험성 평가와 기준 마련, 제도적 규제 도입을 진행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노 기술의 위험은 나노 입자를 흡입, 폐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다. 폐포에 침착된 나노 입자는 배출되지 않는다.

서울대 산업의학과 백도명 교수는 “폐포는 섬포세포가 가래를 뱉어내는 기관지처럼 배출 기능이 없어 독성이 있는 미세분진에 매우 취약하다”며 “보통 10마이크론(㎛ㆍ100만분의 1m)보다 작은 경우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위험성은 분진의 독성과 노출량에 따라 다른데, 대규모 토목공사가 집중적으로 진행됐던 대공황기 미국에서는 불과 수개월 만에 진폐증으로 사망한 터널 공사 인부의 사례가 보고됐다.

물론 은나노 세탁기나 나노 화장품 같은 제품에서 나노 입자는 인체에 안전한 물질과 단단하게 결합돼 있어 흡입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생산자나 연구자는 나노 입자에 노출될 수 있고, 또 제품의 사용연한이 지나 재활용하거나 폐기할 때 소각되면서 결합이 끊어진 나노 입자가 ‘나노 오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서강대 화학공학과 이재욱 교수는 “나노 수준에서 물질은 녹는 점이 높아지는 등 물성이 크게 달라져 기존의 폐기 기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것”이라며 “나노산업이 성장해 제품이 대량 생산될 경우 폐기 과정에서 분출될 수 있는 나노 입자가 얼마나 유해한지, 어떻게 포집할 것인지 등을 살펴보고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노 입자가 생체에 깊이 침투할 가능성도 우려되는 문제 중 하나다. 10나노미터(㎚ㆍ10억분의 1m) 정도라면 세포 사이를 마음대로 지날 수 있는 크기여서 피부나 호흡기, 소화기 등을 통해 나노 입자가 뇌, 신경 등에 닿았을 때 독성을 일으킬지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

백도명 교수는 “나노 입자가 신경에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험적으로 증명돼 있다”고 말했다. 독성 여부는 좀더 연구해봐야 하지만 나노 입자는 상대적으로 표면적이 넓어 활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생체 안에서 예기치 못한 반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 같은 나노 입자의 유해성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제도적인 규제도 도입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나노기술 연구를 총괄 지원하는 국가 나노기술 개발전략(NNI)은 2004년 나노 물질의 분자ㆍ세포 수준에서의 상호작용, 환경과 상호작용, 잠재적 위험 등에 대한 연구에 총 1억6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과학재단(NSF)은 나노 물질의 환경영향에 대한 100개 연구과제를 수행 중이며, 미 국방부도 5년간 550만 달러를 들여 나노 물질 독성 연구를 지원한다.

영국은 과학기술안전위원회의 사전 승인 없이는 나노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규제장치를 마련했다. 또 같은 물질이라도 나노 규모로 작아지면 물성이 크게 바뀐다는 점에서 신물질로 분류해 기준을 따로 적용하는 제도 정비도 추진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유일재 박사는 최근 기술표준원이 주최한 ‘나노 기술ㆍ제품 표준화를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사전 예방 원칙에 따라 표준화한 위험성 평가 방법을 개발하고, 지침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논란이 일고 있는 생명공학의 경우 연구비의 일정 부분(약 5%)을 사회적, 윤리적, 법적 이슈(ELSI)에 할애하는 원칙이 있듯이 정부는 나노 기술 연구에도 ‘위험성 연구 할애 원칙’을 세워야 할 때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한국아이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