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엔 노동자 지키는 ‘강한기관’
노동재해 왕국 멍에를 벗자 ⑧ 법과 제도가 힘이다
▲ 노동자들이 고공에서 파이프에 두 발을 딛고 ‘곡예’를 하는 경기도 성남시의 한 학교 신축공사장(위)과, 작업을 위해 계단과 통로를 완벽한 구조물로 설치한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의 한 아파트신축공사장(아래). 납득하기 힘든 이런 현실은 바로 법과 제도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성남·스톡홀름/특별취재팀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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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동환경청(SWEA, Swedish Working Environment Authority) 건물에 들어서면 벽면 한 쪽에 설치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언뜻 보면 그저 대형 벽돌을 무질서하게 쌓아놓은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벽돌 사이 틈 이곳 저곳에 2~3cm 크기의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놓여 있다. 지난달 취재진을 반가이 맞은 이 기관의 베르틸 레마에우스 부위원장(5n 사진)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형물 옆에서 “노동자는 철저히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라며 노동환경청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스웨덴 노동청 ‘입법권’ · 독일 공제조합 ‘작업중지권‘
저웁 버금가는 권한 받아 ‘안전 파수꾼’ 역할 톡톡
스웨덴에서 노동환경청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관한 한 사실상의 전권기관이다. 노동안전감독관들의 현장 관리·감독뿐만 아니라, 갖가지 법규까지 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이던 노동환경청이 입법기관까지 겸한 것은 지난 1990년대 초였다. 당시 스웨덴 국회는 노동안전과 관련한 세부 법령에 대한 입법권을 노동환경청에 부여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레마에우스 부위원장은 “국가는 노동안전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라며 “주무기관에 관리·감독권은 물론 입법권까지 부여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실제 이 곳에선 노동안전감독관들이나 노조(노동자) 등이 새로운 법규의 제정 필요성을 제기하면, 노사 대표에게 의견을 구하는 절차를 거쳐 3~6개월 안에 법규를 제정하고 있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의 나라가 노동안전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에 입법권까지 갖도록 하면서 강력한 권위와 집행력을 부여하고 있다면, 독일 같은 나라에선 ‘노동재해보험’의 성격을 지닌 직업공제조합이 정부기관 이상으로 노동안전의 파수꾼 구실을 하고 있다.
26개 산업별로 설립된 독일 직업공제조합(HBVG)은 고유의 ‘보험’업무말고도 산업 특성에 맞게 예방지침을 마련하고, 독자적으로 사업장의 안전을 감독한다. 안드레아스 포그트 독일건설직업공제조합 기술감독관은 “현장에 나가 점검한 뒤 사고가 나면 감독관도 책임져야 한다”며 “때문에 위험요인을 눈감아 달라는 사용자가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더라도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술감독관에겐 시정 지시를 수용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해 곧바로 작업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법으로 보장돼 있다. 크레고르 됩케 독일직업공제조합연합 대변인은 “위험 사업장에 대한 직업공제조합의 작업중지권은 관리·감독의 실효성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등 이들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노동재해율이 높은 일부 선진국에선 이른바 ‘기업살인법’((Corporate Killing Law) 제정 움직임도 일고 있다. 노동재해는 기업의 ‘과실’이 아니라 ‘고의’에 해당되는 만큼 중대 노동재해를 발생시킨 사업주는 ‘살인죄’에 버금가는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게 법안의 요지다. 이 법은 2002~2003년엔 캐나다와 호주의 몇몇 주에서 제정됐고, 영국에선 법안이 성안되어 현재 의회에 계류 중이다.
노동재해왕국의 ‘오명’을 벗기 위한 우리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거북이 걸음’을 하는 동안 앞선 나라들은 또다시 ‘토끼 뜀’을 하고 있는 셈이다.
스톡홀름·런던·베를린/특별취재팀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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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협조등 덕에 지금의 스웨덴 이뤄”
국립노동연구소 대외협력담당
스웨덴은 전세계로부터 노동재해 예방과 관련해 부러움을 사는 나라다. 하지만 안전한 일터와 건강한 노동자의 나라를 만든 그 주역으로 꼽히는 국립노동연구소(National Institute for Working Life)의 카이 엘그스트란드 대외협력담당(5c사진)은 그 비결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에 관한 한 이견이 없는 정치권 △담당 정부기관에 주어진 강력한 권한 △가입율이 70~80%에 이르는 강력한 노조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생산성으로 이어진다는 사용자들의 자각 △노동재해에 대한 정확한 통계와 독립된 연구기관의 5가지를 꼽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환경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 기존 기득권층에 대한 ‘혁명적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던 때 스웨덴은 이미 세계 최고 부자 나라였습니다. 물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그 뒤 노동자를 혹사하며 이뤄진 급격한 발전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절 스웨덴에서도 파업과 노동쟁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스웨덴에선 곧바로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 해결을 위한 노력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노동자의 삶과 안전은 전 사회적 관심사이자 최대의 정치적 의제가 됐습니다. 노동안전국으로서의 기틀이 잡혀진 것도 바로 그 때였습니다.”
1920년~1970년 반세기 동안 7개의 노동 관련 법안이 제정됐지만, 1971~1973년의 불과 3년 동안 15개 법안이 제정됐다. 스웨덴 노동안전의 보루인 노동안전청(Swedish Work Environment Authority)이 생겨난 해도 1972년이었다. 경제발전 수준을 따져보면 지금의 한국보다 결코 더 낫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스톡홀름/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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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험업종 탓 말고 꼼꼼한 법·제도 서둘러야
▲ 박두용 한성대 교수(노동건강연대 기획위원)
노동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와 적게 발생하는 나라의 차이는 무엇일까? 혹자는 우리나라에는 건설업이나 조선업, 중화학공업 등 위험업종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변명에 불과하다. 자동차가 많다고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게 아닌 이치다. 국제통계를 봐도 위험업종이 많고 적음에 따라 노동재해율이 높고 낮은 게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노동안전 선진국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안전보건 관련 법령이 많고 정교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경영계에서 ‘규제완화’와 ‘자율관리’를 주장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거론하는 나라인 영국은 노동안전·보건 법령만 490여개에 이른다. 영국이 자율관리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뒤엔 물샐 틈 없는 법령과 정교한 제도가 버티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툭하면 대형 노동재해가 터지고 하루에 8명씩이나 목숨을 잃는 일이 몇 십년 동안 반복되고 있다. 여기엔 바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법과 제도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노동재해 예방체계가 허술한 것은 이른바 ‘산업안전정책’이 ‘노사정책’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온 탓이 크다. 또 노동정책의 기조도 다분히 통제적이며 억압적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재해 예방은 늘 노사정책의 하위개념으로 설정되고, 노동재해는 감춰지기 일쑤다. 현장에서도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노동안전의 문제는 다툼의 대상이 되고 투쟁과 협상의 카드로 전락되고 있다.
수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외국인노동자, 그리고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는 온갖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떠맡고 있지만 이들에게 안전과 보건을 위한 서비스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특수고용직, 농어민, 그리고 영세자영업자는 노동재해 위험도 훨씬 높고 실제 발생도 몇 배나 높지만 산재보험 대상에도 들지 못한다. 경제활동인구가 2300만명에 이르지만 산재보험을 적용받는 노동자는 겨우 1100만명으로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우리의 노동안전 행정체계는 아직도 20세기의 낡은 틀 그대로다. 산업구조나 고용문제만 바뀐 게 아니라 노동재해의 규모와 유형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오염은 광역화되어 작업장은 물론 이제 사무실도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수은중독과 같이 특정한 유해물질에 중독되는 후진국형 사고는 줄었지만 노동자들은 이름도 모르는 수십 종의 화학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십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새로운 암과 근골격계 질환 같은 신종직업병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안전은 ‘안전의 시각’으로 보아야 문제가 풀린다. 때문에 이제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을 위한 정책을 노사정책에서 분리해야 한다. 이원화된 예방과 보상체계도 통합하고 여러 부처에 흩어진 안전관리 행정체계도 서둘러 일원화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노동재해 예방행정도 통제적, 억압적, 사후적, 소극적 규제정책에서 벗어나 적극적, 능동적, 사전적, 전문적 책임 행정서비스 체계로 탈바꿈해야 한다. 정부는 더 이상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을 낡은 노동행정의 틀에 묶어두지 말아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청의 설립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과 거시적 국가안전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박두용 한성대 교수(노동건강연대 기획위원)
특별취재팀
양상우·김기성·정대하·김양중 기자
자문
백도명(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노동건강연대 대표), 박두용(한성대 교수, 노동건강연대 기획위원), 이상윤(산업의학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