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봉제공장 ‘근로조건은 70년대’

[경향신문 2006-02-23 11:22:42]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가 요란하다. 비좁은 공장 안, 먼지가 폴폴 날린다.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하루 10시간 이상을 일하는 사람들. 1970년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사르며 작업시간 단축과 건강진단 실시, 임금인상 등을 요구했지만 봉제공장 여성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2006년, 그들은 아직도 고단한 1970년을 살고 있다.
◇“일감이나 끊이지 않았으면…”=봉제공장 시다(보조) 장모(56)씨는 집에 돌아오면 드러눕기 바쁘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했으니 득달같이 씻을 만도 한데 그럴 기운조차 없다.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실밥을 뜯고 재료를 모아 재단사와 미싱사에게 건네는 일은 시다의 몫. 온종일 숨 돌릴 틈이 없다. 오후 1시부터 점심시간이지만 그나마도 말뿐이다. 밥 한술 뜨는데 10분이면 족하다.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또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일감이 많은 날에는 밤 10시까지 일한다. ‘밤일’을 한다고 수당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저녁밥 대용으로 나오는 빵과 우유, 혹은 김밥 한 줄이 전부다. 허리, 어깨, 눈… 안 아픈 데가 없어 쉬고도 싶지만 어쩌다 하루 결근하면 일당 3만원은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장씨의 한달 벌이는 고작 75만원. 그나마 월세를 포함해 생활비를 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몇 푼 안 된다. 다행히 집과 공장이 가까워 차비가 들지 않아 조금의 돈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일감이 없는 달에는 무급으로 집에서 쉬기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빠듯한 살림에 ‘너무하다’ 싶다가도 ‘내가 못나서 그런 걸 어쩌나’하고 한숨만 쉰다. ‘밤일’이 많더라도 일감이나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공장은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있다. 출입문 하나가 유일한 숨통이다. 가끔 ‘불이 나면 큰일이다’는 생각을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다. ‘언니’ ‘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직원들끼리 농으로도 이야기해본 적도 없다.

20여명이 일하는 제법 큰 공장이지만 4대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사업자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형편이니 직원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최근에서야 퇴직금과 4대 보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장씨는 심드렁하다. 재단사와 미싱사는 대부분 30~40대지만 시다는 전부 50대. 그러니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괜스레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부터 해고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 나이 먹고 갈 데가 있나. 주방보조도 안 시켜주는데. 힘들어도 어떻게 해. 불만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일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죽으나 사나 해야지.”

◇“사회적 구조부터 바꿔야 ‘산다’”=봉제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노동구조의 근본적인 문제가 봉제공장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며 “시장의 붕괴가 노동자들의 생활 기반까지 뒤흔들고 있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동대문의류봉제협회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만 2천600백의 봉제공장이 있다. 그러나 전국의 봉제업체가 몇 개인지는 파악된 바 없다. 큰 의류공장들이 임금이 싼 중국이나 동남아로 빠져나가면서 봉제공장은 소규모·영세화됐다. 최소한 필요한 인원만 남기고 미싱을 돌린다.

또 중국의 값싼 의류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일감이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수입과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게 됐다. 노동자들은 일감을 따라다녀야만 했다. 미싱을 하겠다는 사람도, 봉제업을 하겠다는 사람도 없다. 악순환은 되풀이되고 있다.

동대문의류봉제협회 차경남 전무이사는 “정부가 의류제조업을 사양산업으로 내몰면서 의류수입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져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형편이 어렵다”며 “그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자국의 섬유, 의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쿼터제를 실시하고 있다”면서 “공장형 아파트와 같은 형태로 영세사업장을 양성화하고 덤핑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황현숙 부회장은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사실도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으로 여성 노동자는 보조적 존재로만 인식돼왔다”며 “또 여성노동자들의 대응력이 약하다보니 저임금 장기간 중노동 등 봉제공장의 열악한 근로조건 문제를 묵인해온 것”이라고 주장이다.

이에 황 부회장은 “봉제공장을 비롯한 생산직 여성들은 임금체불과 고용 불안정 등의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준수되는지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여성을 경제활동의 주체로 인식하려는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