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죽음의 마라톤
[경향신문 2006-03-03 09:14:22]
얼마 전에 비교적 조용히 지나간 일이 있었다. 경남 창원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공장 O사의 직원 이모씨(44)가 마라톤 연습을 하다가 사망한 사건이다. 마라톤 경주의 참가자가 사망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독특한 것은 사망 시간이다. 그는 밤 9시에 회사에서 4㎞ 떨어진 국도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왜 마라톤 연습을 밤에 하는 걸까?
-어느 근로자의 국도변 사망-
듣자 하니 그는 사고 당일 밤 8시까지 일을 한 후 사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달리기에 나섰다고 한다. 아침이면 모를까, 어두운 밤에 위험한 도로에서 마라톤 연습을 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흔히 비정상적인 경우를 가리켜 “달밤에 체조 하냐?”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그냥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니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한 사람이 왜 피곤한 몸으로 마라톤 연습에 나섰을까?
유족들의 요구도 이상하다. 그의 죽음이 ‘산업재해’라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유족들에 따르면 이씨의 마라톤은 회사로부터 강요됐다고 한다. 이씨의 부인은 “평소 남편이 마라톤 연습 때문에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지난해 한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다가 기록이 좋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사원에게 취미생활을 강요했다니, 대체 무슨 얘기일까?
이씨의 유족들은 “2000년 11월 김모 사장의 취임에 맞춰 운동을 즐기는 문화에서 고과에도 반영되는 마라톤 강제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임 사장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심오한 이유에서 사원들의 마라톤 실력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한 후, 취미로나 하던 운동이 졸지에 목숨 걸고 뛰어야 하는 죽음의 경주로 둔갑해 버렸다는 얘기다.
사실 마라톤이라는 운동 자체가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수도인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리다가 숨을 거둔 한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종목이 아닌가. 밀레니엄이 두 번 지난 후에도 마라톤 평원의 병사는 여전히 ‘산업전사’로 이름을 갈아 달고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그런데 사원의 근무 능력과 그의 취미생활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인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왜 그것을 인사에 반영하는 걸까?
사장의 개인적 철학이 아무리 심오해도, 그것이 회사를 넘어 가정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근무를 마친 근로자의 생활은 어디까지나 가정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취미를 인사에 반영할 경우, 이 벽이 무너지고 근로자의 삶 전체가 회사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근로자의 인격 전체가 사장이 발휘하는 미시 권력의 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근로자들을 사장 개인의 노비로 만드는 봉건적 문화다.
-“신임사장이 사원에 운동 강요”-
이번 사건은 우리 기업들에 흔한 관행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근로 시간 이외의 시간은 마땅히 근로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그것까지 넘보는 것은 남의 유한한 삶에서 귀중한 시간을 강탈해 가는 파렴치한 강도짓이다. 국가의 권력이 개인의 침실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자본의 권력 역시 개인의 사적인 영역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이번 사건은 명백히 인권침해다.
인권유린은 국가권력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권유린은 자본권력에 의해 저질러진다. 근무 시간 외에 경영자의 사적인 업무를 보거나 원하지 않는 회합을 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치적 인권의 개념은 이제 사회적 인권의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할 권리. 이것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다.
〈진중권/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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