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적 의료체계의 폐해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보건의료자원의 생산과 제공에 있어서 전적으로 시장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재원조달 방식에서 공적 보험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적 이해를 철저하게 보장하는 사적 의료체계에 기초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적 의료체계는 보건의료서비스의 무정부성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국민의료비의 급격한 상승, 의사의 도시 집중 현상, 진료강도의 지속적 상승, 고가의료장비의 무분별한 확산과 도입 등이 단적인 예이다.
또한 극소수의 국립병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유주체가 민간일 뿐만 아니라, 정부가 설립 주체인 상당수의 공공병원 역시 정부의 재정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민간병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시장의 무정부성이 보건의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고, 정부의 조정 및 기획 기능은 일부 건강보험의 수가 통제를 제외하면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다.
이러한 사적 의료체계의 폐해는 보건의료서비스의 제공에 국한되지 않고 재원조달 측면에서도 전반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건강과 의료이용을 시장의 질서에 묶어두는 구조로 작용하고 있는 보건의료비에서 개인부담의 증가는 재원조달의 공공성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부터 1998년 사이에 보건의료서비스에 지출한 비용 중 가계가 직접 부담한 몫이 41.6-53.0%에 이르러 다른 OECD 국가의 2-10배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보험 방식으로 건강보험이 운용되고 있지만, 재정위기의 해결책으로 본인부담을 더 높이려는 방향을 설정하고 더 나아가 민간보험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이 제기되는 등 시장적 질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특히 WTO 시장개방의 움직임이 가속화하면서 영리법인의 인정, 민간보험의 도입 등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 이래저래 사적 의료체계의 폐해가 더 커질 것이 예상되고 있다. 2004년까지 마무리되어야 하는 DDA 협상 일정 때문에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압력이 점차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아직까지 보건의료 분야에서 명시적으로 개방을 요구한 국가는 중국 등 몇 개 국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형병원자본의 국내 진출과 민간의료보험 시장의 확장을 희망하는 미국 등의 시장개방 압력은 특정 분야를 지정하는 방식이 아닌 수평적 규범을 관철하여 시장개방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 예상된다.
2. 공공보건의료의 실태
한국의 공공보건의료기관은 2001년 기준으로 종합병원 이상의 의료기간 57개소, 일반 병원급 의료기관 28개소, 요양 및 특수 병원이 24개소, 군병원 21개소, 보건소?보건지소?보건진료소 등 보건기관 3,400개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건기관을 제외한 실제 진료가 주요하게 이루어지는 공공의료기관은 130개소에 불과하다. 전체 병상에서 공공병상이 차지하는 점유율을 보면 2001년을 기준으로 한국은 8.1%에 불과한 수준이다. 시장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를 운영하는 미국조차도 공공병상 점유율이 1996년 현재 33.2%에 이른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의 공공보건의료가 매우 취약함을 알 수 있다. 더욱이 DJ 정부 출범 이후 공공병상의 절대적 규모가 늘어나지 않으면서 전체 병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5년 만에 1/5 이상 비중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 : 1) OECD Health Data, 2002
또한 한국의 공공보건의료기관은 상당수가 그 기능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고 공공성 확보를 위한 체계나 기전이 확보되어 있지 않아서 민간의료기관과 기능의 차이를 찾기 어렵다. 일부 국립병원을 제외한 국립대학병원이나 지방공사의료원 등은 공공병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성과를 주요한 평가의 근거로 설정하고 경영수지 개선을 가장 핵심적인 병원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DJ 정부 이후 더욱 심해졌는데, 지방공사의료원의 경우 지자체의 재정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민간병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그 과정에서 지역 내 의료급여 대상자의 의료수요 중 상당 부분을 담당하였던 기능을 축소하는 등 저소득층 의료이용 보장의 마지막 보루 역할마저 담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경영 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공공병원을 매각하거나 민간에 위탁 운영하면서 유사 규모의 민간병원에 비해 평균진료비가 유사해지거나 오히려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공공의료의 취약성은 예산 규모에서 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OECD 국가의 경우 평균적으로 보건의료예산만 중앙정부 예산의 14% 이상을 투입하고 있는 실정인 반면, 한국은 보건복지예산에서 따지더라도 2001년 현재 3%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특히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보건의료에 투입되는 예산 규모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3. 시장의 과잉과 건강의 위기
IMF 경제위기를 빌미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사회 전체에 유래 없는 실직과 고용불안을 가져왔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로 각종 사고, 심장질환, 자살 등이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암 발생의 증가까지 우려되고 있는 현실이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실업 당사자 및 가족이 겪게 되는 고통은 비용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런데 불안정 노동의 증가가 가져온 건강의 위험은 실직자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규직 노동자는 노동강도의 강화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누적된 스트레스와 물리적 부하의 증가를 해소하지 못한 채 과다한 노동강도에 의한 반복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미시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업조직의 개편과 무한 경쟁기전의 도입은 노동자에게 새로운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자본은 중심부 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로 노동조직을 재편하고 성과급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 무한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의 전략은 노동자의 자기 통제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서 작업조직을 완전하게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IMF 경제위기 이후 빈부격차의 확대는 사회적 연대 또는 지원체계를 약화시키고 있고,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 수준의 약화를 가져온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처럼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건강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공공보건의료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점차 누적되고 있는 건강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며, 보건의료의 특성상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장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4.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선결 과제
공공보건의료의 강화에 앞서 선차적으로 요구되는 과제 중 하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전체 진료비의 50% 이상을 비급여 또는 본인부담으로 해결하면서 은밀한(?) 경쟁력을 키우고 있는 민간의료기관의 재원 마련의 사적 구조를 통제하지 않는 한 공공의료기관이 민간의료기관의 경쟁력을 따라잡기 어렵다. 공공의료기관이 일정한 예산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비급여 구조가 확대 재생산되는 한 원천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총자본의 부담을 높이고 의료보장 수준을 높일 뿐만 아니라 사적의료체계를 확대 재생산하는 재원구조를 사회적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민간보험 및 영리법인의 도입을 저지하는 것이 공공보건의료의 강화에 앞서 달성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해나간다면 민간보험의 도입의 근거를 무력화할 수 있지만, 그 일정을 확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민간보험의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확실하게 저지하지 못한다면 보건의료의 사적 성격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공공의료의 자리는 더욱 왜소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건의료의 이용 및 건강에 있어서 빈부격차의 심화는 가속화될 것이고 중소병원의 몰락을 포함한 대형병원자본 중심의 재편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공공보건의료가 확대 강화해야 할 근거 및 이유를 대중적으로 설명해내는 작업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공공보건의료를 강화해야만 가난한 사람의 건강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현재 의료기관의 비정상적인 이윤창출 행태를 폭로하고 그러한 행태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대다수 민간병원의 의료행태가 왜곡되어 있고 불필요한 곳에 과다한 의료자원이 집중되어 있어서 의료의 질이 떨어지고 있음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의료의 확대는 결코 저질의 의료를 확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의료의 필요에 따라 양질의 적정 의료를 제공하자는 것이고 국민 전체로 보아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의제를 선점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정세적 조건에서 공공의료의 확대를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려놓는 작업이 쉽지 않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내년 총선을 계기로 일정한 사회적 의제화가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형성될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향후 10개월 동안 보건의료운동 진영이 취해야 할 태도는 명확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흐트러진 조직을 정비하고 내부 이견을 정리하고 조직화하는 작업에서부터 가능한 한 전문가 풀을 확대 강화하고 각종 매체 및 교육선전 도구를 활용하여 사회적 의제화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 준비된 활동만이 실제적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당연한 결론을 다시 한 번 주장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