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최근 4월, 일부국회의원에 의해 수차 도급노동자에 대한 산재보험 책임을 현행 원도급업체(이하 ‘원청’)에서 하수급업체(이하 ‘하청’)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의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의원입법형식으로 발의된 개정안이 아직 통과된 것은 아니나, 차후 정부발의입법형식을 빌어 ’통합징수법‘이란 새로운 법명으로 제정될 위기에 놓여있다. 현재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합리성이란 명목 하에 법 제정에 대한 찬성론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산재은폐가 만연되어 있는 건설현장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이며, 건설현장에서의 산업재해 증가, 산재은폐 증가를 필연적으로 부르고 건설노동자를 사회보장으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것임이 분명한 졸속적인 법안이다.

2. 개정안의 주요 골자 : 최하 단위 하청업체에 산재보험 책임을 지움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에 있어 수 차례 도급으로 행해지는 사업의 경우 원수급인을 사업주로 보아 가입과 보험료 납부책임을 부과시키는 현행제도를 삭제하고, 각자의 고용관계에 따라서 그 책임을 귀속시키겠다는 내용이다. 즉 건설노동자를 고용한 가장 최하 단위의 하청업체에게 고용, 산재보험의 책임을 지우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대부분 ‘오야지’로 지칭되는 자가 고용관계의 사실상 사용자가 될 것이다.

정부는 개정안이 필요한 이유로 2005년 1월에 개정 시행될 산재보험법 개정 내용 중 건설공사의 경우 면허업자에 의한 공사의 산재보험 확대적용을 – 무면허업자에 의한 2000만원 미만 공사 및 100평 미만 공사는 여전히 산재보험에서 제외 – 들고 있는데 이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개정안은 건설자본, 특히 원청인 대기업건설자본의 편의와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에 지나지 않으며, 건설노동자의 생존권과 생명권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것일 뿐이다.

3. 수차에 걸친 하도급 하에서 건설노동자의 현실

2002년 한해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노동자는 19,925명으로 전체 산재노동자 81,000여 명 중 약 1/4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산재보상을 받은 노동자의 숫자이다. 실제로 산재로 다치고도 공상으로 처리하거나, 자기부담으로 치료받은 노동자는 제외된 수이다.

건설업의 경우 타 업종에 비해서 다단계 식으로 수차에 걸친 하도급 구조 하에서 공사가 이뤄지고, 5만여 개에 육박하는 건설업체의 부도가 비일비재하여 건설노동자의 노동법상의 권리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건설업체의 경우 건설수주 입?낙찰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 소위 사무실은 없고 전화번호만 있는 유령회사가 횡행하기 때문에 건설업체의 부도는 사실상 미리 예견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여 건설노동자들의 경우 노임을 받지 못해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가 없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는 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만연한 임금체불은 열악한 건설노동자의 생활을 더더욱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설현장에서 산재가 일어났을 때 하청업체의 부도나 행방불명 등 사유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산업재해 책임이 원수급인에게 있다는 산재보험법 9조에 근거하여 재해노동자가 원청을 사업주로 하여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건설업의 경우 공사기간이 한시적이라서 전체 공사기간 중 각각의 하청업체가 담당하는 공사 기간이나 공정 또한 한 달이 채 안 되는 경우가 많고 건설공사의 경우 다양하고 복잡한 공정의 총합으로 이루어지고 각각의 하청업체가 맡은 공사를 독립적으로 볼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산재보험법에서 원청업체의 책임 귀속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건설현장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하청으로 책임주체 변경의 결과 나타나는 문제점

1) 산재은폐의 증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건설현장에서의 산재발생율은 전체 산업재해 중 1/4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산재보험에 처리된 결과를 집계한 수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전체 재해 중 어느 정도가 산재로 처리되고 있는가? 건설산업연맹의 자체 통계조사에 따르면 그 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0%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꿔 말해 건설현장의 재해 중 약60%가 사실상 산재은폐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수급업체로 산재보험 책임주체가 변경될 경우 건설현장에 만연되어 있는 산재은폐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건설노동자들의 경우 불확실한 소득의 흐름 구조상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산재처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청업체로 산재보험 책임주체가 변경되면 근거리에 있으면서 건설노동자의 고용문제를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하청업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 건설노동자 스스로 알아서 산재처리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사회안전망으로부터 소외의 증가

그간 건설노동자들은 일용직이란 이유로, 전 사업장에 전면 적용되고 있는 고용보험에서조차 배제되어 왔다. 특히 건설노동자의 경우 공사가 한시적으로 지속되고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빈번히 실업상태에 직면함으로써 누적된 실업기간이 다른 타 업종의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고 소득흐름의 불확실성이 큰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그나마 고용보험에서 소외되었던 건설일용노동자가 2004년 1월부터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법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산재보험도 면허업자에 의한 공사일 경우 공사금액과 무관하게 전면 확대 적용으로 법개정이 이루어져 그간 배제되어 왔던 사회안전망의 혜택을 건설노동자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 산재보험의 책임주체가 하청업체로 바뀌게 되면 매일 부도로 사라져가고 있는 하청건설업체의 현실에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확대는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실업과 재해로 인한 고통의 몫은 그대로 건설노동자들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원청의 도덕적 해이

보통 건설업의 경우 다양한 공정이 총체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사고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한가지 공정을 담당하고 있는 하청업체의 독립적인 책임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ILO 또한 원수급인의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산업안전보건관리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만일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책임이 하청으로 변경되는 문제가 현실화된다면 원청은 건설노동자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보건관리나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사항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재해가 발생한다 해도 그들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재해발생 억제 유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상 굳이 그 책임과 의무를 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책임은 하청업체에게 떠넘기고 이윤은 그대로 챙기게 되니 원청으로선 이익이 배가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원청의 도덕적 해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5. 맺으며

앞서 지적한 문제점과 같이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책임이 하청업체로 변경될 경우 현재 업종별 산재발생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설업의 산업재해를 더욱 증대시킬 것이며, 건설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명권을 짓밟는 결과를 야기하고, 원청의 횡포에 대한 면죄부를 결과적으로 부여하는 형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하청업체로 책임 주체를 변경하는 개악안은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소외 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실현되고 구체화되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정부는 노동현실에 기초한 정책, 그 노동현실 위에 소외계급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정책을 입안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