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강남의 아파트 값에 대해 거품이라는 말이 많다.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생산이 바탕이 되지 않는 거품은 가라앉기 마련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안이 텅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하게 보였던 거품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열정? 혁명론? 사상? 아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 허전한 것이 있음을 또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최근 일이다. 지난 여름, 나에게 사색을 주는 시간은 언제나 출퇴근길이었다. 남한강은 새벽녘에 흐름의 자취를 안개로 남겨두었고, 반딧불은 나의 퇴근길을 반겨주었다. 나지막한 길에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들, 그 사이에 반짝이는 반딧불의 애벌레, 이런 풍경과 어울리는 벌레 소리들. 하루하루 이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운 일상이 되어있었으며, 나는 이런 풍경을 즐기고자 자전거 대신 도보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시간의 흐름을 논을 점령한 일직선의 벼들의 변화하는 모습에서 발견하던 나에게, 미처 가슴에 와 닿지 않던 늘 그러한 일상들이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며 최근에야 늘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존재하는 것은 다듬어지고 길러지는 것만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전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들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산부추, 며느리 밑씻개, 수까치깨, 등근 매듭풀, 바늘사초, 산숙, 구절초, 쑥부쟁이, 사철쑥, 새콩, 굉이밥,꿀풀, 새잎 양지꽃, 쇠뜨기, 조밥나물, 석잠풀, 박주가리 덩굴, 딱지꽃, 황금, 제비꽃, 달맞이꽃, 배초향, 땅빈대, 물봉선, 쇠별꽃…

 

아이러니하게, 감옥에서의 고민과 사색은, 일상적인 삶을 박탈당하는 조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일상적인 삶과, 생명과 인간의 조건에 침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조금한 햇빛이 아쉬워 온몸을 던지는 암실의 화초가 된 것처럼, 감옥 창문 같이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검증하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처절하게 즐겼던 것이다. “시대의 불행은 시인의 행운”이라는 황지우의 말을 따로 두고서라도, 지난 한국 정치 현실의 엄혹함은 우리시대와 민중에게, 긴 산통이후 태어난 옥동자처럼, 옥중문학을 선물했다.

 

야생초 편지는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황대권씨가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것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도 또한 우리처럼 “내 인생을 내 의지로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영어의 몸으로 지내게 되자, 거대담론의 이전을 구성하는 미시적 세계에 눈을 띄게 되었다.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지가 않는, 죽음의 이전 단계에 이르자, 몇 가지 계기로 인해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감옥에서 허약해진 자신의 몸을 치료하고자 야생초를 먹다가, 척박하고 험한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리고 있는 야생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상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식물종- 물론 알려지지 않은 식물, 사람들이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한 식물종이 더 많습니다만- 이 약 35만여 종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35만여 종의 식물 중에서 인간들이 재배해서 먹고 있는 것은 약 3천종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35만에서 3천을 빼면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대략 34만 7천 종의 식물들을 전부 잡초라고 없애 버리는 그런 우를 지금 인류가 범하고 있어요. 그것이 어째서 잡초입니까. 그래서 저는 잡초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에 저는 야초(野草)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이 야초는 하나하나가 모두 나름대로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아직 그 가치를 잘 몰라요. 모른다고 해서 무조건 없애버리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이렇게 잡초를 공부하다가 발견한 아주 멋들어진 정의가 하나 있어요. 에머슨이라는 학자가 붙인 정의인데요.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

-황대권씨의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모임 강연에서-

 

그는 제국주의의 지배력은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에도 강제되어 있다고 보면서, 이런 제국주의적 농업을 극복하는 길을 야생초의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역으로 생명력에 기반한 공동체주의에서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베트남이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힘의 근원은 바로 마을 공동체였으며, 이런 공동체의 연대감이 제국주의에 맞서 제 3세계 민중들이 자주적인 삶을 살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나, 아니면 공산주의 이상론보다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나라는 적고 백성이 적은- 이웃나라의 담장이 보이고 이웃나라의 닭소리가 들리는-” 동양의 고대 이상사회였던 대동사회(大同社會)에 기초하는 듯하다.  

 

이제까지의 거품의 빈 공간의 속에 무엇이 빠진 것일까? –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의 생각이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기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그것이 바로 현실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야하는 이유는 바로 살아있다는 것, 거대한 희망을 쫓지 않더라도 조금만 발을 내려다보면, 미시적 즐거움이 또한 자리 잡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수많은 말과 말사이, 그사이의 침묵과 침묵 속에서 우리는 의심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의미가 있다는 것과 의미가 없다는 것- 그것이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정말 삶”에 기초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내가 있는 양평에 있는 식당에서 양념이 아닌 “약념”으로 요리를 하는 식당이 있는데, 거기석 먹은 구절초 무침은 정말 예술이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며, 또한 매콤한 양념과 더불어, 똑 쏘는 떯은 맛은 한 번 맛본 사람은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다. (야생초 편지에서는 구절초 김치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자연 야초로 음식을 하는 식당을 소개하자면, 양평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남한 강변에 따라 ‘옹화산방’, ‘산당’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 ‘담원’이라는 식당이 있다. 양평에 오시는 분은 즐겁게 야생초 식사를 하고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