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읽는가?

 

이는 매우 난감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복합적인 질문이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읽는다. 그 읽음의 대상은 책, 신문, 디지털화된 텍스트, 그리고 영상 매체에 걸쳐 있다. 읽음의 대상을 책으로 한정짓는다해도, 영상 매체의 전방위적 공격이 시작된 이래로 ‘책의 죽음’이 논의되고, 그 논의의 객관적 근거도 무시 못할 상황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책을 읽는다. 텔레비전, 비디오, DVD, 영화 등 영상 매체의 물결이 범람하는 가운데 그것에 익숙해진 우리도 끊임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에 굴복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권, 아니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의 책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며 온라인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러한 ‘강박관념’의 구조는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 기원을 이른바 ‘근대’로부터 찾는다. 연대기적으로는 1920-30년대를 지칭하는, 저자에 표현에 따르면 ‘현재와 직접 이어져 있는 한편 미래를 예견하게도 하는 그런, 아주 연緣 두꺼운 과거’인 이 ‘근대’는 현재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저자는 이 ‘근대’로부터 ‘독자’가 탄생되었고, ‘근대’의 어떠한 특징적 양상들이 ‘배워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한국인의 정신 상태를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를 통과하면서 한국인들은 엄청난 문화적 격변을 겪게 되었다.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문화는 서양과 일본에서 수입된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문화에 단시일 내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고 그것을 이끌어 가는 힘은 새로운 미디어였다. 대중은 새롭게 등장한 책과 연극, 영화 등의 미디어를 수용함으로써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 나갔고 그 변화를 이끌어 나갔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변동의 중심에 ‘책읽기’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자는 그러한 책읽기의 중심이자 첨단으로서 ‘소설 읽기’를 제시한다. 근대 독자의 형성은 곧 소설 독자의 형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위와 같은 문제 설정 아래 먼저 근대 독자 형성의 문화적 조건을 꼼꼼하게 되짚어 본다. 저자는 그러한 문화적 맥락으로 네 가지 항목을 제시한다. 첫째, 구활자본 소설을 통해 전개된 문자 문화의 대중화, 둘째, 문맹과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용하는 이중언어 상황의 문제, 셋째, 독서와 ‘시각적 현대성’의 성립 문제, 넷째, 연애편지 쓰기로 대표되는, 급격히 사회화하던 ‘글쓰기’ 문화가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근대의 독자들이 위와 같은 조건 속에서 어떠한 책읽기 패턴을 보였는가를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실증적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 특징들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1920년대의 독서가 근대적 의미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능’과 ‘오락’으로서의 독서 영역이 확대되어 갔다. 한편 ‘사회주의’와 관련된 책들에 대한 독서가 늘어감과 동시에, 족보의 발간 증가와 ‘정감록’ 독서 인구의 증가 등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점차 일본어로 된 소설을 읽는 인구가 많아졌다.

 

한편 위와 같은 조건과 양상 속에서 일정한 독자층이 형성되고 분화되었다. 대표적으로 근대적 대중독자와 엘리트적 독자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 학생, 노동자, 인텔리겐차 등이 각자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구별되는 독자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자층의 분화에는 감각의 육성과 소설 수용 양식의 제도화 과정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문단’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고급문학/대중문학의 이분법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선별과 배제의 매커니즘에 따라 문학사적 정전을 구성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계몽적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상과 무지몽매한 우중으로서의 독자상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대중’ 혹은 ‘다중’이 주목받고 있다. 소리 없는 다수 혹은 무지몽매한 우중으로 생각되던 대중들이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월드컵 경기 때 붉은 악마와 더불어 나타난 한국의 대중은 미선이?효순이 추모 촛불 집회, 탄핵반대 촛불 집회에 이르기까지 뱀이 꿈틀대듯 이리저리 요동치며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대중의 존재에 대한 주목은 비단 이러한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작가와 텍스트에 중점을 두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수용자 혹은 대중의 자발적 수용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련의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대중이 단순히 작가의 의도에 따라 감동하고 계몽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변용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전환에 따라 당대의 문화적 현실을 분석하기 위하여 주목하는 문화 현상도 변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주된 관심의 대상은 이른바 ‘고급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이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자본주의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대중을 우민화하는 것으로 비판당한 대중문화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형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변형하는 대중의 능동적 행위로 인하여 복권된다.

 

이 책의 주된 관심도 ‘근대적 대중독자’의 탄생에 맞추어져 있다. 이전 시대와 다르게 엄청난 규모로 늘어난 대중독자의 탄생과 형성, 그것이 한국 근대 문화의 제조건을 형성하는 동력이자 결과였다는 것이다. 문맹률의 감소로 말미암아 ‘농투성이 무지랭이들과 장돌뱅이들, 개 잡고 소가죽 벗기던 이들, 심지어 그 자식들까지 학교 문 앞을 기웃대고, 그러다 급기야 모든 사람들이 책이란 걸 읽고, 나아가 글줄까지 긁적거릴 줄 알게 된 일종의 개벽’이 일어난 후 ‘문자의 독재’가 시작되었고 근대적 대중독자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이들은 ?춘향전? 등의 고전소설에서 ?혈의 누? 등의 신소설을 거쳐 ?무정?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을 감동시키는 소설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저자들과 소통하였다. 근대의 작가들은 특유의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계몽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었으나, 이 시기 대중독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소설을 읽으며 감동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조직해 나갔다는 것이다.

 

근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고급소설/대중소설, 고급독자/대중독자의 이분법은 현재에도 낯설지 않다. 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이른바 고급소설의 몰락에 우려를 표명하며 ‘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그 와중에 대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 소설, SF 소설, 판타지 소설 등에 열광하며 이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린다. 평론가들과 작가들의 한탄과 근심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자신의 소설 선택과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현재에 익숙한 이와 같은 문학장의 포즈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근대에도 문단이란 것이 형성된 이후로 이러한 우려가 되풀이되어 왔다. “도대체 고급문예라는 것이 뭐냐? 어떤 흥행극단에서는 희곡이라는 말을 알 수가 없어 그냥 ‘희극’으로 이해하기로 했다는 시대, ‘적的, 화化’가 남발되다 못해 ?창피적的?이라는 말까지 사용되는 이 현하의 경성에서, 도대체 고급문예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 (중략) … ?사랑의 불꽃?이라든가 ?사랑의 불거웃?이라든가는 현대 조선문단의 일류문사들이 기고를 하였다고 써 있다. 문사! 문사! 일본말로 ?시모노세끼?가 어떠하냐. 정말로 창피한 일이지, 어떤 얼어죽을 문사가 그 따위의 원고를 다함께 쓰고 앉았더란 말이냐”고 일갈하는 시인 홍사용의 한탄은 전혀 현재에도 낯설지 않다.

 

근대로부터 형성된 이러한 거대한 골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해소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대중의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대중은 브라운 운동을 하는 아메바이며 신비한 카오스 그 자체’라고 말하며, 서설에서 ‘독자는 주체인 작가가 생산한 작품과 그 의미를 수용?소비하는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는 사회적 행위를 통하여 의미의 실현이나 재창출에 기여하는 또 다른 주체’라고 언급하면서 대중 독자의 역할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이 전면적 긍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대중은 무식하지도 유식하지도 않으며, 고상하지도 비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독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지평 내에서는 언제나 가장 성실하게 텍스트를 읽고, 권위에 근거하여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를 신비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며 대중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이러한 문제에 정답을 제시하기란 난망한 일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정답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중독자를 무지몽매한 우민으로 치환하여 교육하려는 계몽주의적 태도나, 대중독자를 전면적으로 긍정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당화하려는 대중추수주의에서 벗어나, 대중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공감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대중,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책을 읽게 되는가? 대중의 움직임이란 과연 분석될 수 있는 것일까? 과감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 진리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일임이 분명하다’고 언급하는 곳에서 보여지는 바, 대중의 역동은 늘 사후적으로 분석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인식의 일단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한편 이 책은 이른바 ‘문단’의 긍정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얼마 전 한국에서 몇몇 평론가들과 작가들에 의해 ‘주례사 비평’, ‘패거리 문학’의 폐해가 적극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이들은 현재 한국 문단의 폐쇄성과 연고주의를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이 역량 있는 작가와 작품의 발굴에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문단 권력’의 존재를 제기하며 이의 발전적 재구성 내지는 해체를 주장하였다는 측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문단 권력의 문제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책을 읽는가? 문단 권력은 우리의 선택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저급/고급소설의 구분, 통속/대중/순수소설의 구분, 명작과 평작의 구분 등 실로 많은 선별과 배제의 과정이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종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현재의 이러한 문단 권력의 형성이 근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문단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상징 투쟁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이 이른바 ‘문학사적 정전’을 구성하고 ‘문학사’를 서술하며 독자들에게 배타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단 권력 형성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독자들에게 부여된 평가의 기준이 초월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단 권력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가치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문학사를 서술하고 문학사의 정전을 구성하는 하나의 규준으로서 ‘문단’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문단의 선별과 배제의 매커니즘에 영향을 받아 대중의 책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문단 권력의 헤게모니는 결코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문단 권력은 끊임없는 상징 투쟁의 결과로 대중의 일정 정도의 승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단이 폐쇄회로에 갇혀 내부적 에콜만을 강조할 때 이러한 문단권력은 와해될 수 있다. 결국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