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형 인간 따라잡기 열풍이 의미하는 것

미국엔 좋은 차를 탄 사람 순서대로 출근한다는 말이 있듯, 성공한 사람들의 아침은 부지런하다. 새벽 3시에 기상하는 빌게이츠, 아침 7시30분이면 업무를 시작한 잭 웰치 전 GE 회장 등 세계를 움직이는 CEO들은 하나같이 “아침형 인간” 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해 뜨기를 재촉했다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을 비롯해 우리나라 1백 대기업 CEO들의 평균 기상시간은 5시54분,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새벽 5시에 기상한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의 숱한 조찬 모임 역시 아침형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다…
– ‘성공을 부르는 아침형 인간의 조건’ (중앙일보. 2003.12.28.)

 

이 본원적 축적에 대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자연법 철학자들이 국가의 출현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이, 자본의 출현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독립적인 노동자가 존재했는데, 그는 아주 정열적으로, 지능적이고 경제적으로 노동하여 저축하고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노동을 시키고 음식을 먹여주는 식으로 도왔습니다. 이 관용의 대가로 그는 자신의 수익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증대된 재화를 갖고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불쌍한 사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노동, 절약, 관용에 의한 자본의 축적이 유래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유행이라는 것이 늘 그러하듯 남들 다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왠지 뒤쳐지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특히 이러한 유행은 언론이나 방송매체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어떤 패션, 어떤 말, 어떤 직업,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학문 등등

이 중에서 최근 유행하는 말 중에 ‘아침형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평생을 사는 동안 1/3 이상을 잠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렇게 허송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덜 자고 열심히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정도로 이해가 된다. 즉 이 유행어의 함의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먼저 잡는다’는 속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왜 주목을 받게 된 걸까? 요즘 사람들이 늦잠을 많이 잔다거나 회사나 학교에 지각을 훨씬 더 많이 한다는 통계조사결과가 나온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아침형 인간’을 얘기할 때는 빼놓지 않고 나오는 예가 배로 재벌 총수들인데, 다시 말해서 통상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어느 회사 CEO는 몇 시부터 일어나서 일을 시작한다든지, 또 어떤 정치인은 몇 시부터 일어난다든지 등등. 예컨대 사회에서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한 사람들의 생활을 분석해보니 평범한 사람들과 어떤어떤 점이 다르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 사람들처럼 ‘아침형 인간’으로 살면 경제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얘긴데… 말처럼만 된다면야 이건 보물지도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없을 지도 모를 보물지도를 찾는 것보다야 힘들지만 부지런히 살면 누구나 다 재벌이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눈이 번쩍 뜨일 일인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고등학교의 등교시간은 오전7시30분이었던 것 같다. 더 빨리 등교를 해야 하는 일류학교(?)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벽3시에 일어나는 빌 게이츠에 비한다면 늦잠을 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등학생들의 평균 취침시간을 생각한다면 결코 늦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모든 학생들은 이미 ‘아침형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일류대학 입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아침형 인간’으로 3년을 꼬박 살아도 말이다.

‘아침형 인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에 대한 일종의 신화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어떻게 부자는 탄생하는가에 대한 자본주의적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신화는 진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진실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뿐이다.

‘아침형 인간’처럼 부지런한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보다야 경제적으로 잘 살게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점에서 진실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지런한 사람들이 재벌만큼 잘 살게 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에서 본원적 축적을 설명하면서 ‘자본의 출현’에 대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도덕적인 설교에 대해서, 소위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이루어진 약탈, 도둑질, 가혹한 세금에 관한 이야기, 토지로부터 쫓겨나고 농지가 파괴되어 거리로 내몰린 영국 농민층의 폭력적인 토지수탈에 관한 이야기 등의 예를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 비해서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게을렀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신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어쩌면 이미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일찍 일어나야 진정한(?)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럼 결국 잠도 포기하라는 말인데… 이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더라도 ‘아침형 인간’으로 사는 것은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처음에 했던 질문, 그러니까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필자는 수많은 우리나라 노동자를 숨가쁘게 몰아세우고 있는 이 ‘아침형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연원이 진지함과 성실함이라는 윤리적 의무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지함과 성실함’ 자체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자들로 하여금 현재도 충분히 진지하고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강조되는 ‘윤리적 의무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인간을 인류학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라는 학명으로 부르며, ‘호모 파베르’(제작하는 인간)라 부르기도 한다. 전자는 고전적?계몽적 이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후자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경제 우위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호모 루덴스’(노는 인간)는 인간이 그리고 노동자가 ‘생각하고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님을 얘기하고 있다. ‘아침형 인간’을 이야기는 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한번이라도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빨리 잡혀먹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