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아키라(鈴木明?42)는 ‘눈이 많은 고장’ 나가노에 태어났다. 1982년에 메이지(明治) 대학에 입학, 학생운동을 하다가, 1990년부터 97년까지 도쿄에서 영세사업장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과 산재직업병 상담활동을 했다. 97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노동건강연대에서 지역노조와 함께 하는 ‘성수동사업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동과건강』에 일본의 다양한 노동자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이면서, 함께 나아갈 동지들인 일본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 편집자 –

 

‘도쿄 동부 노재직업병 센터’ 상근자가 되어 처음에 맡았던 상담은 이주노동자 산재상담이었다. 1990년 가을의 일이었다. 자동차부품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출신인 R씨의 산재상담은 지역노조를 통해서 들어왔다.

 

일본에 있어서 이주노동자는 1980년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거품 경제 아래 브라질 등 일본계 남미 사람이나 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급증에 대해 정부와 노동성은 1988년 을 책정해 전문?기술분야에 대한 외국인 허용과 단순노동은 안 된다는 단순노동 불가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1989년에는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해 일본계 남미노동자의 취업을 합법화하였다.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에 따라 노동상담도 늘어났다. 임금체불, 해고 그리고 산재. 이러한 노동상담은 지역노조(유니온)나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NGO단체가 맡게 되었다. 이주노동자가 상담을 하자고 하면 그들에게 문을 열고 있는 지역노조 만이 상담에 응해 주었다.

 

이주노동자는 모국의 친구끼리 공동체를 형성한다. 자기 문제가 해결이 되면 어려운 친구를 데려오므로 지원단체도 남아시아 출신자가 많은 단체, 남미 출신자가 많은 단체 등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어쨌든 800만 명을 조직하는 노총인 ‘연합(RENGO)’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극적인 조직 방안을 세우지 않는 지금, 한 사람이라도 가입할 수 있는 지역노조가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있다.

 

R의 직장은 ‘마치코오바’라 불리는 작은 공장이었는데 낮에 방문하면, 일하는 사람이 이주노동자 네 명밖에 없었다. R과 인도 출신인 형제, 그리고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는 스무 살의 여성이 있었다.

 

사장은 제품 배달 등 외근이 많아 교섭하기 위해 시간을 잡는 게 어려웠다. 공장 2층에 기숙사가 되어 있고, 거기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했다. 공장은 어둡고, 더럽고 구조적인 하청화에 허덕이는 ‘마치코오바’이었다.

 

마치=동네, 코오바=공장 인데, 제조업의 말단 구조에 있는 동네공장은 산업 공동화에 따라 경영하기가 어렵다. 자본력이 없는 동네공장은 설비투자도 힘들다. 일본에서는 ‘3K’라는 말을 쓰면서 사람이 일하기 싫은 일터를 표현한다. ”Kiken”(위험하다), “Kitanai”(더럽다), ”Kitsui”(힘들다)가 3K인데 일본인이 일하지 않는 사업장에 이주노동자가 들어 일하고 있다.

 

R은 연마기계로 손가락이 잘려 버린 산재를 당했다. 작업을 서두르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한다.

 

R의 회사는 산재보험 미가입 회사였는데, 사장에게 호소했는데도 결국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서 한국의 노동사무소에 해당하는 노동기준감독서에 신고해 감독서 지도로 산재보험에 가입하게 되었다.

 

일본 노동법에는 국적조항이 없기 때문에 외국인에게도 산재보험이 적용된다. 산재보험도 마찬가지고 산재보험 미가입이라도 산재 발생시까지 소급해서 가입하면 산재노동자는 구제할 수 있다. 요양신청서, 휴업급여신청서에 사업주증명이 없더라도 ‘사업주가 증명하지 않는다’고 감독서에 제출하면 처리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영세사업장에서는 ‘최저 노동조건인 노동기준법, 최저한 보상인 산재보험’이라는 개념이 사업주에게 없다. 그래서 사업주와의 교섭은 그런 사업주를 설득하는 걸로부터 시작한다. “외국인에게도 산재보험을 할 수 있고 보상되니까 산재보험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대부분의 사업주는 이주노동자가 산재를 당하고 일을 못 하게 되면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는 채 해고한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이 주거지를 확보하기가 힘들다. 부동산 유리에 있는 물건 표시에 ‘외국인 불가’라고 써 놓는 것이 일본인이 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주거를 사업주가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주가 보증인이 되고 방을 얻거나 공장 부지 안에 있는 컨테이너에 사는 예도 있다. 그러므로 해고는 주거 상실과 직결된다.

 

이렇듯 이주노동자를 기계처럼 대하는 사업주이지만, 상담으로 만난 이주노동자 가운데 사장이나 사업장에 있는 일본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 점에서는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주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불만으로 든 것과 차이가 난다 할 수 있겠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이 주거지를 확보하기가 힘들다. 부동산 유리에 있는 물건 표시에 ‘외국인 불가’라고 써 놓는 것이 일본인이 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주거를 사업주가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이주노동자의 차이라면 투쟁방법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동지인 조합원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일은 있지만, 일본 노조지도부는 이주노동자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피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주노동자도 집회에 참여하고 시위도 같이 하는데 연행, 즉 강제추방 대상인 이주노동자를 앞세우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권력과의 마찰에서 방조제가 되도록 한다. 한국처럼 시위에서 이주노동자가 경찰과 몸싸움하거나 단식농성을 하는 것은 일본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탄압에 맞서는 일본 운동의 역동성이 모자란 것처럼 보인다.

 

일본 정부의 2001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 인구는 1억2700만명. 외국인등록을 한 외국국적 사람은 177만명이다. 이 속에는 일제시대 일본에 살게 된 한국, 대만 출신자와 2세, 3세인 ‘특별영주자’ 50만 명과 영주권을 얻은 ‘일반영주자’ 18만명이 포함된다. 그리고 법무성-입국관리국이 말하는 ‘불법체류자’는 22만 552명이다. 1993년 29만8,646명이 최고치로,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 총노동력인구는 6,889만명이다.

 

일본에서 ‘불법체류자’ 단속은 주로 주요 전철역에서 실시된다. 그러나 입국관리국은 2004년 2월 14일부터 홈페이지 상에서 ‘불법체류자’에 관한 정보를 접수하기 시작해 시민단체, 변호사회 등으로부터 삭제를 요구받아 있다. 입국관리국은 홈페이지에서 “우리나라에게 좋지 않는 외국인을 강제로 국외로 퇴거시키는 것으로 건전한 일본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불법체류자 = 범죄의 온상”이라는 문구는 경찰로부터 발신되고 언론을 통해서 선동되어 있다.

 

“B는 손가락 끝을 재단기에 잘린 산재를 당해 요양중이고 치유를 기다리는 단계였는데, 입국관리사무소에 수용되었다. 거기서 의료기관에 다니고 의사 판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친구끼리 방을 얻어서 같이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집단으로 살면 이웃 사람의 눈에 띈다. 소리가 시끄럽다고 주민이 신고해서 출동한 경찰에게 불법체류자로 연행된 예가 있었는데 본인이 산재 상담한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도 몇 명이 잡혔다. 산재를 당해 일할 수 없고 요양중인 이주노동자가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연행된 것이다.

 

S는 식품회사에서 대형 교반기로 팔을 부러뜨린 산재를 당해서 재수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요양이 오래 걸리는 S는 매달 정해진 날에 입국관리사무소에 출두하는 것으로 입국관리국이 판단해 풀려나기도 했다.

 

B는 손가락 끝을 재단기에 잘린 산재를 당해 요양중이고 치유를 기다리는 단계였는데, 입국관리사무소에 수용되었다. 거기서 의료기관에 다니고 의사 판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에게 산재치료나 임금체불이 있는 경우 입국관리국은 일단 노동채권을 노동자가 얻을 때까지 강제추방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B는 방글라데시 사람인데 인도 여권을 갖고 있었다. 돈을 주면 언제든지 위조 여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 B가 인도로 갔는지, 방글라데시로 갔는지 궁금하다.

 

일본인은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이다. 구미 사람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갖고 아시아 사람에 대해서는 멸시하는 일본인의 경향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서구 문화 섭취와 아시아 참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천왕제’라는 강력한 장치로 민중을 통제하여 제국주의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패전 후도 천왕제 이데올로기를 유지해 왔다. 전후 민주화도 미국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일본 민중은 스스로 천왕제를 단죄하고 침략의 역사를 청산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일본정부는 전쟁책임을 다하지 않고 일제의 만행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채 현재에 이르러 최대의 전쟁책임자인 천왕과 천왕제가 남아 있다. ‘만세 일계인 천왕을 받들어 모시는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일제시대에 강제되면서 그 잔재를 제거하지 않고 온 일본인이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고치기 위해서는 일제 침략사의 청산과 다민족 공생의 시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