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통이 부족하지 않다. 반대로 우리는 소통을 너무 많이 한다. 우리는 창조가 부족하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부족하다.” –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1980년대 이래로 전지구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재편의 흐름은 전세계 민중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음이 속속들이 증명되고 있다. 국경을 넘나들며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금융자본 및 투기자본은, 1997~8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와 남아메리카 국가의 금융 위기를 초래했고,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넘긴 위기는 세계 금융 질서에 상존하는 위협으로 도사리고 있다.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구조조정에 대한 압력은 각국에서 실업률의 증가, 비정규직의 증가, 노동자 실질임금의 감소 등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의료, 교육, 전력, 식수 등 민중들의 삶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가 사영화됨에 따라, 민중들의 생존의 조건이 직접적으로 파괴되는 양상도 증가하고 있다. 전세계의 부가 상위 20%에 집중되어 하위 80%는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해악이 드러남에 따라, “다른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는 구호 아래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오던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점차 적지 않은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각 대륙과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저항의 흐름은 1999년 시애틀 투쟁을 기점으로 점점 더 그 지향을 명확히 해 가고 있고, 전세계 민중들에 의해 조직된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구호 아래 대안적인 세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저항은 무르익지 않은 듯하다. 국지적인 전투에서 소규모의 승전보는 간간이 들려오고 있으나 저항은 아직 많은 면에서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다. 특히 20세기 초중반 투쟁의 흐름을 이끌었던 유럽 노동운동의 침묵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은 존재한다. 이에 그간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맞서 싸운 민중들의 저항 중 몇몇 알려진 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성공한 저항의 예들을 소통시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럼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의 상상력과 창조성, 그리고 저항을 매개하기 위함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은 옳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와 ‘현재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을 통해 21세기형 저항의 전략과 전술이 구체화될 것이다.

노동착취기업에 맞선 노동자-학생 연대
노동착취기업에 반대하는 학생연합(United Students Against Sweatshops)의 예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보편화되면서 일반화된 생산 양식 중 대표적인 것이 제3세계로의 위험산업 혹은 노동착취산업의 외주화이다. 기존에 제1세계에 존재하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유해한 작업환경의 노동착취기업은 자국 노동자들의 크나큰 저항에 직면하여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원거리 무역에 제약이 없어지게 되자, 초국적기업은 그러한 노동착취 공정을 제3세계에 유치함으로써 초과 이윤의 착취를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 일대에 광범위하게 초국적기업의 외주공장이 생겼다. 이들 초국적기업의 제3세계 외주공장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아동노동까지 혹사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등 유명 스포츠용품 회사의 의류 및 신발, 갭스, 디즈니 등의 의류 및 완구 등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유포된 세련된 기업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장시간노동으로 혹사당하는 동남아시아 어린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세련된 기업이미지 뒤편의 추악한 실상을 폭로하고, 이들 기업이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운동이 미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이 노동착취 공장을 제3세계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회사들과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들 회사에는 나이키, 리복, 갭, 디즈니 등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미국의 대학이 라이센스의 형태로 이들 기업과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챙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생다운 패기와 창조성을 발휘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있어서도 탁월한 방법을 개발하였다. “Behind The Label”, “Anti-Sweatshop”등을 구호로 홈페이지를 만들고, 이곳에 초국적기업의 제3세계 공장의 열악한 노동실태를 비디오로 촬영하여 링크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마련하여 대중들이 이들의 지침을 따름으로써 회사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도록 하였다. 한편 각 학교 캠퍼스에서는 ‘대안적 패션쇼’를 열어, 문제가 되는 회사의 의류를 입고 신발을 신은 모델이 패션쇼를 벌이는 동안, 장내 아나운서는 이들 회사의 악랄한 노동착취 형태를 고발하고 촬영한 비디오를 상영하여 자신들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이러한 캠페인에는 30여 개 이상의 학교가 참여하였고, 1999년에 이르러 이들은 노동자권리협회(Worker Rights Consortium)를 창립하여, 지속적으로 학교와 계약을 체결한 회사의 노동조건을 감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나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이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운동의 성공은 학생들의 창의적인 운동 방식 덕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중요 조건은 제3세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성공은 학생들의 창의적인 운동 방식 덕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중요 조건은 제3세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초국적기업의 제3세계 하청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였고 초국적기업에 대항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의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예를 들어 레비 스트라우스 기업에 의해 해고된 샌 안토니오의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불매운동을 벌였다. 멕시코 접경지역인 마퀼라도라에 있는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탄압 가운데에서도 독립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진행하였고 공장을 점거하였다. 캠페인을 진행하던 학생들은 이들과 직접적인 연대를 시도하였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할 수 있었다. 투쟁하는 노동자 집단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이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권리를 위하여 싸우는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에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의 운동은 미국의 노조운동과도 적지 않은 관계를 가졌다. 존 스위니에 의해 주도된 미국노총(AFL-CIO)의 개혁노선은 이전의 보수적인 색채를 다소나마 버리고 이러한 학생들의 운동을 여러 모로 지원하였고, 역으로 학생들의 운동 역시 미국노총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개혁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운동은 외부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초국적자본의 행태에 눈뜨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학교 자체가 얼마나 기업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학교는 기업과 갖가지 계약을 통해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학내의 다양한 서비스들을 노동착취기업에게 외주화함으로써 이득을 챙기고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저임금의 대학원생들을 착취함으로써 강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학교의 기업화에도 저항하였다. 강사노조를 지원하였고, 노조에 적대적인 다양한 서비스업체와의 계약에 저항하였으며, 학내의 청소부, 식당조리사 등으로 이루어진 노조를 지원하였다.

노동착취기업에 반대하는 학생연합의 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저항하는 운동이 어떠한 형태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들의 운동은 전지구적이다. 발달된 통신 수단을 통하여 이들은 제3세계의 노동착취 현장을 고발하고 그것을 본인들의 이슈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제3세계 노동자와 제1세계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이 연대하여 초국적자본의 착취에 대항하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몇 가지 한계 및 위험성도 지적되고 있다. 미국노조의 보수적인 성향에 영향받을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한편 학생그룹 내부의 인종 문제도 심각하지는 않지만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백인 학생들인데 이들이 자국 내의 인종 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이 운동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무엇보다도 아직 이 운동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노동착취 기업에 반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들의 투쟁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을 막아내고, 새로운 세상의 한 끝을 열어갈 지에 대하여 많은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

불안정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저항
– 아르헨티나 실업노동자 봉기의 예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전지구적으로 전면화되면서 노동 구성의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 있다.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외주화의 결과로 노동의 유연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실업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불안정노동자층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노동 구성의 변화에 따라 운동 진영에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의 문제가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불안정노동자는 그 ‘불안정성’으로 인해 조직화되기 어려운 많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그들을 묶어 공동의 투쟁을 만들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불안정노동자 투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들의 투쟁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여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심은 만큼 거두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안정노종자 투쟁의 가능성을 아르헨티나 실업노동자 봉기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2001년 8월 아르헨티나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실업노동자들이 봉기하여, 300여 곳 이상의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아르헨티나 경제 활동을 마비시켰다. 이들은 2001년 9월까지 이러한 고속도로 점거를 광범위하게 벌여 나갔고 노조는 파업으로 이러한 실업노동자들의 봉기에 연대하였다. 이 운동은 노조뿐 아니라 지역 상인, 연금생활자, 공중보건 종사자, 교사, 인권운동가 등 다양한 시민세력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지속되었고, 결국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었다.

“이 운동은 노조뿐 아니라 지역 상인, 연금생활자, 공중보건 종사자, 교사, 인권운동가 등 다양한 시민세력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지속되었고, 결국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었다”

사실 이들의 승리는 긴 시간에 걸친 피땀어린 투쟁의 결과였다. 처음에 이들은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정부에 전달하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대해 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이들은 전술을 바꾸었다. 그들은 공공기관을 점거하고 때로는 방화하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6년 6월과 1997년 4월에는 두 곳의 도시에서 도로 점거와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그들은 사영화된 전력회사에 의해 자행된 전력 요금의 인상과 단전 조치에 대해 항의하였다. 광범위한 사영화 정책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나 정부는 IMF가 요구한 긴축 예산 정책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은 더욱 단련되었고 보다 전투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들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시장주의자들에 의하여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수행되고 있었다. 공기업은 광범위하게 매각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된 많은 수의 공장들이 폐쇄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인하되었고 노동조건이 악화되었다. 수천 명의 공공 부문 노동자들이 수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노동조합은 큰 타격을 입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교육, 의료 서비스와 같은 공공 서비스 제공이 제한되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0~80%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빈곤선상에서 근근히 생활을 꾸려 나갔다.

한편 주체적 측면에서 조직화를 위한 조건이 충족된 면도 있다. 해고된 산업노동자들, 청년실업자, 여성 가장 등이 주변부 도시지역에 광범위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이전에 공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노조 활동과 집단 행동의 경험을 가졌던 다수의 해고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 동안 지속된 경제 위기로 인하여 여성과 청년실업자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전투성도 증가되어 있었다. 이들의 밀집 지역이 고속도로와 가까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이전의 실패를 거울 삼아 독립적으로 조직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당시 보수화되어 있고 관료화되어 있던 노조나 정당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조직화를 진행하였다. 사실 이전부터 기존 노조에 의해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는 모두 실패하였다. 이는 이들이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정규직 노조원의 투쟁에 ‘동원’하기 위한 세력 정도로 생각하는 등, 이들 조직 자체를 부수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정당들에게는 더욱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직접 행동을 행하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실업노동자운동(Unemployed Workers Movement, MTD)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풀뿌리 조직을 통하여 조직되었고 매우 탈집중화된 형태를 띠었다. 이들은 밑에서부터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가며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수평적인 구조를 유지하였다. 모든 결정은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참여하는 공개된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각 지역에는 독자적인 단위가 구성되었고, 이러한 지역 조직의 협의 기구가 존재했다. 여기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이 협의 기구에서 모든 투쟁 전술과 요구조건이 정해졌다. 정부가 협상을 제의하였을 때에도 이들은 대의된 대표와 진행되는 협상이 아닌, 이와 같은 공개된 협의 기구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협상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함께 협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형식화된 대표나 리더를 가지지 않았다.

이들 투쟁의 성공에 있어 고속도로 점거라는 전술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이러한 전술은 산업노동자들이 기계를 내려놓고 생산을 멈춘 것에 맞먹는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전술은 물류의 유통을 막아 생산과 소비의 흐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고속도로 곳곳을 점거하고 집회를 열었다. 실업노동자 가족과 여성 가장들은 아예 고속도로 옆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기까지 하였다.

“운동이 진행되면서 요구조건들이 더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식료품 문제의 해결, 투옥된 수백 명의 동료 실업노동자의 석방, 식수,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 보장에 대한 요구를 추가하였다”

처음 그들의 요구조건은 국가가 보조하는 일자리의 창출이었다. 그러나 운동이 진행되면서 요구조건들이 더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식료품 문제의 해결, 투옥된 수백 명의 동료 실업노동자의 석방, 식수,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 보장에 대한 요구를 추가하였다. 고용에 대한 요구도 처음에는 임시 고용에 대한 요구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최소임금을 보장하는 정규 고용에 대한 요구로 바뀌게 되었다. 특정 지역의 경우에는 이들이 주변부 도시를 장악하고 해방구로 선포하여 독자적인 권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정책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지역적 요구를 넘어 전국조직인 MDT는 국가 부채의 상환 정지, 긴축 예산 정책 포기,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 포기, 공공 부문의 회복 등을 요구하였다. 2001년 9월에 전국의 실업노동자 대표, 노조지도자, 학생 대표,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2000여 명이 모여 6개의 주요 요구안을 작성하였다. (1) 구조조정 정책 중단, 구금된 활동가들에 대한 법적 절차 중단; (2) 긴축 예산 정책 중단; (3) 공공 부문의 고용 증대, 16세 이상의 모든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식품 공급, 실업노동자에 대한 등록 절차 확립; (4) 영세농민들에게 1헥타르당 일백 페소(약 12만 원)씩의 지원금 지불; (5) 해고 금지; (6) 무장 경찰의 즉각적인 철수.

노동운동의 침체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은 실업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불안정노동자층의 증가를 그 이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꼽곤 한다. 많은 노조 지도자들은 이러한 불안정노동자 계층이 조직하기도 힘들고, 경제에 미치는 효과도 미미하며, 집단 행동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다고 불평하곤 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실업노동자들은 불안정노동자 계층도 충분히 조직될 수 있고, 집단 행동을 벌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크나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 운동은 지역의 운동이 단숨에 국가적인 문제 제기를, 더 나아가서는 전지구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운동 역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동의 주도 세력들이 보였던 지역주의의 문제, 운동의 진행과정 속에서 노조와 정당, 다른 운동세력과의 관계 설정 문제, 대안 권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역할 등에 대해서 많은 논쟁점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속에서, 노동운동의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심각한 파열을 내는 방법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