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역사는 민중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돌이켜 보면, 우리는 역사에 대해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역사가 어떠한 ‘철의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젖어들 때가 종종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일차적으로 결정되는 ‘구조’에 따라 역사가 발전한다는 생각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무대 위에 있는 인간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게 하고, 중요한 것으로 고려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한편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인 극단으로서, 역사는 역사 속의 한 위대한 인간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회변화의 원동력이 ‘사회구조’인가 ‘인간 행위’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사회이론의 해묵은 논쟁이다. 여러 사회이론가들이 각자의 논거를 가지고 여러 설명을 하고 있지만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에게서 컨센서스를 이루어가고 있는 방향이 없지는 않다. 사회변화는 구조에 의해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 행위에 의해서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구조와 인간행위의 상호 작용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고 사회변화의 추동력은 양자 모두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간단한 것도 같지만, 이 사이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끊임없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는 아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에서 명백히 드러난 폐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범했던 오류를 되풀이할 때가 적지 않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쉽게 경제결정론적 환원주의에 빠지고, 객관주의에 젖어들며, 목적론적 역사관에 감염된다. 이러한 오염에 대한 해독은 끊임없이 필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언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설정된 여러 가지 구조에 의해 자동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호흡을 가진 계급들의 계급 투쟁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에릭 홈스봄의 는 민중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역사의 입체성을 느끼게 하여 준다. 이 책의 원제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인데, 저자는 책 속에서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어 왔음을 역설한다. 역사책 어느 귀퉁이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없었던 이들이지만, 그들의 가까운 동지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들, 인간으로서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많았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이러한 이들에 의해 역사는 이루어져 왔음을 강조하며 저자는 이들 하나하나의 업적을 복원한다. 물론 저자의 관심은 한 개인이 아니다. 집단으로서의 그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특정 신념과 행위의 근거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행한 그들의 행동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저자는 시종일관 애정 어린 서술을 진행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노동계급 및 노동운동과 관련된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전통적인 농민을 다루고 있으며, 3부에서는 현대사 속에서 보통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상의 인간의 의식적인 의도나 결정과는 거의 무관하게 전개된 현대사의 순간들을 서술하고, 4부에서는 재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단 홈스봄의 논의는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흔히 ‘부차적’이라고 생각되어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들에 그는 분석의 현미경을 들이댄다. 일례로 ‘노동 전통’이라는 장에서 그가 행한 설명에 의하면, 같은 노동운동이지만 영국의 노동운동과 프랑스의 노동운동은 상당히 판이한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나라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따른 것이다. 그도 또한 이러한 전통에 의한 운동 양식의 차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전통적인 차이는 운동 자체의 성격보다는 활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운동 양식은 어쩌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으며, 그 자체가 곧 그 운동인 시기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그는 평화운동의 예를 든다. 평화운동은 역사적으로 항상 영국에서 유별나게 강했고, 프랑스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프랑스 좌파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애국적(민족적)이었던 데 반해, 영국 노동운동 속에는 호전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도덕적 혐오가 깊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1914년의 영국독립노동당은 교전 국가에 있어서 전쟁에 참여하길 거부한 유일한 비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고, 자유주의자에 불과했던 두 장관이 그로 인해 내각에서 사임한 유일한 교전국가가 되었다. 또한 1870년대 후반, 보어 전쟁 기간, 1930년대, 1950년 후반 등을 돌아보면, 침략 혹은 전쟁에 대한 반대를 통해 영국 좌파는 가장 효과적으로 단결하고 활기를 띠었다고 홈스봄은 설명한다. 특히 그는 1945년 이후 두 나라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한다. 프랑스의 경우는 공산당이 반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적 평화운동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에 반해 영국은 핵에 반대해 여론을 동원을 의지나 능력을 지난 정치조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공식집단을 통해 핵무장 해제를 위한 평화 캠페인을 벌였고, 이 캠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핵 운동이자 다른 나라 운동가들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넒은 의미에서 영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운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홈스봄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에 대한 관심이 많고 이것에 많은 페이지를 할당한다. ‘메이데이의 탄생’ 장에서는 그는 메이데이의 직접적 기원이 1889년 7월 프랑스혁명 100주년에 파리에서 열린 경쟁적인 두 인터내셔널 대회 중 하나(맑스주의적 인터내셔널)가 통과시킨 결의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당시 결의문이 그 이후의 메이데이를 의도하거나 계획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첫째, 그 결의문은 단순히 단발적인, 즉 일회적으로 끝나는 국제적 시위운동에 대한 요청이었다. 둘째, 그것이 특별히 축제나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제안도 없었다. 셋째, 그 결의문이 당시에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징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까닭에 홈스봄은 메이데이가 급격히 부상하고 제도화된 것은 인터내셔널 대회의 결정 때문이 아니라, 그 결의에 따라 조직된 1890년에 있었던 최초의 시위에서 거둔 예상 밖의 성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일부 국가에서는 메이데이 준비에 혼신의 힘을 다하기는커녕, 좌파 정치에서 대개 그렇듯이 시위의 적법한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과 분열 때문에 지역 정당과 운동들이 오히려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대중은 이 시위를 아래로부터 조직해내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이를 정기적으로 진행하자는 논의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메이데이가 조직된 지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메이데이는 세계적으로 성탄절과 1월 1일을 제외하면 가장 보편적인 휴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래로부터 생겨났다. 그것은 익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자리잡았으며, 역으로 노동자들은 1년에 한 번씩 의도적으로 노동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통해 직업, 언어, 국적의 경계를 넘어 자신들이 단일한 계급임을 인지했다. 홈스봄이 메이데이의 기원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논지는 단순하다. 메이데이의 형성과정은 풀뿌리 민중들의 사유와 감정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힘을 예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별적으로는 발언권이 없고, 힘도 없으며,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좌파’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완고하다고 느낄 부분이 없지 않다. 특히 ‘혁명과 성’을 논의한 장에서 펴는 그의 논지가 그러하다. 그는 역사적 분석에 의거하여, 사회개혁운동과 공중의 성적 행동이나 다른 개인적 행위에 대한 관대함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은 별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성적 행위가 공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습은 정치적 지배체제나 사회, 경제적 착취와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흔히 연관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회적, 정치적 검열과 도덕적 검열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금지되어 왔던 어떤 행위를 공식적으로 허용해 달라는 요구는 그것이 정치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때에만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서로 사랑할 권리를 쟁취하는 일이 정치적 행위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성적인 허용 범위를 확대시켜서가 아니라, 인종적 지배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홈스봄은 을 출판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유감스럽게도 혁명과 청교도주의 사이에는 강한 친화성이 있다고 말한다. 혁명운동의 자유주의적인,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율법타파적인 요소는 실제 해방의 순간에 때로 강력하고 지배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결코 청교도적인 것을 극복했던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문화적 반역과 반항은 어떤 징후이지 그 자체로 혁명적인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동요의 시기에 문화적 반역과 반항과 같은 주변적인 현상이 두드러질수록, 더 이상 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애석하긴 하지만,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그들을 타도하기보다는 쉬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홈스봄은 자신이 한번도 맑스주의 전통에서 일탈해 본 적이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저작들이 보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서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저작이 맑스주의자에게도 비맑스주의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여하간 그의 논지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반론을 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홈스봄의 논의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게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가 매우 꼼꼼한 실증적 근거와 주석을 제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홈스봄을 지지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역사를 움직이는 아래로부터의 힘에 대한 그의 전폭적인 믿음과 긍정에 동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