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강보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건강보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건강보험을 개혁하기 위한 투쟁이 1989년대 말부터 시민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의료보험’의 ‘건강보험’으로의 전환, 의료보험 통합일원화의 달성 등의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또는 노동자)의 건강은 개선되었는가? 우리에게 건강보험은 과연 무엇인가?
건강에 대한 건강보험 또는 보건의료서비스가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엄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의 보건부장관 라론데의 보고에 의하면 전체 사망 중 보건의료서비스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약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넓은 의미의 환경, 건강행태 등의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일리히는 의료제도가 사람들의 자율적 건강추구행위를 막아 오히려 질병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일리히의 주장이 너무 과도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보건의료서비스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 평가하여 보건의료서비스의 형평성이 달성되면 마치 건강의 형평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면 의료서비스의 이용의 문턱을 낮추거나 제거해주는 건강보험제도(또는 의료급여까지 포함한 건강보장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건강수준을 사망률이 아닌 좀더 예민한 지표인 ‘삶의 질’로 평가하면 의료서비스의 영향을 좀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사람의 주관적 평가를 반영한 삶의 질을 중요한 결과변수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의료서비스의 형평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의료서비스가 건강수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더라도, 의료서비스의 형평성 달성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의 결과’에 상관없이 질병에 대한 ‘치료 그 자체’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보장해주는 건강보험제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2. 건강보험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가

건강보험의 문제점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정부나 보험자의 입장에서는 진료비의 지속적인 앙등과 보험재정 악화가, 의료공급자에게는 낮은 수가와 이로 인한 소득 감소가 가장 중요한 문제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문제점이다. 건강보험의 목적이 국민의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비로 인한 경제적 파탄을 막아주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이런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낮은 보장성과 이로 인한 불평등

보장성 또는 보험급여의 충실성은 건강보험제도를 시행하는 목적이다. 보장성이 낮아서 국민이 의료비 부담으로 파산하거나 의료이용의 접근성이 낮아진다면 이는 건강보험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된다고 보기 어렵다. 낮은 보장성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험적용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의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낮은 보험적용수준은 쉽게 볼 수 있다. 초음파검사, 자기공명촬영(MRI) 등은 꼭 필요한 경우에도 단지 ‘보험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보험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먹는 식사비용도 의료서비스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다. 예방접종, 금연진료 등은 예방서비스라는 이유로(건강보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비급여를 모두 합하면 입원의 경우 약 34%, 외래의 경우 약 64%를 차지해서, 전체 진료비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비급여는 이식수술 등의 고액진료비를 지불하는 경우에 더 많아지기 때문에 가계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주게 된다.
이런 높은 본인부담금은 두 가지 부정적 효과를 주게 되는데, 하나는 사회계급간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을 빈곤의 나락으로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전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에도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런 의료이용의 불평등은 만성질환에서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질병을 더 많이 앓고 있는 낮은 사회계급이 의료비 부담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의료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액진료비 부담으로 인한 가계 파탄도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특히 이식수술이나 암 치료 등의 경우에는 수천만 원의 진료비를 부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본인이 부담하는 진료비에 합리적인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는 이런 진료비를 스스로 부담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경제적 파탄과 빈곤층으로의 전락을 가져와,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게 한다.

2) 보험료 부담의 불평등

건강보험 통합 투쟁과정에서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은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러면 건강보험이 통합된 지금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은 달성되었는가? 몇 가지 점에서 개선이 있었다.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노동자의 경우 전체 월급 중 보험료가 부과되는 소득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해소되었다. 월급을 받지 않는 ‘소위’ 자영자(소위라 하는 이유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영자가 아니라 일용노동자 등이기 때문임)의 경우에는 개선이 미미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소위’ 자영자의 소득 파악율이 낮고(전체의 30% 정도만 소득이 파악되고 있음), 파악된 소득도 실제 소득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과세특례제도 등 잘못된 조세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부담의 형평성이라는 사회보험의 원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세제도의 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광범위한 건강보험 제외 계층의 존재

우리나라 국민은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급여제도에 포함되거나 건강보험에 강제적으로 가입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건강보장제도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건강보험의 경우 3개월간 보험료를 체납하면 보험적용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있게 되는 것이다. 빈곤선 이상의 ‘차상위계층’의 경우에는 기초생활보장이나 의료급여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기 쉽다. 조금 오래된 자료이지만, 2002년 말 현재 지역건강보험 가입자 중 보험료부과를 위한 근거자료가 없는 세대가 전체 가입대상세대의 6.8%이 이른다. 2001년 5월말 현재 185만 9,266가구가 3개월 이상 보험료를 체납하여 보험적용이 중단된 상태인데, 이는 지역가입자의 22%에 해당하는 것이다. 최근 이들의 일부를 기초생활보장대상자로 선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다. 결국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이들을 위한 의료부조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4) 낭비적인 진료비 지불제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국고지원을 확대하는 등 재원을 확충하는 방법이 있고,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재원을 절약하는 방안이 있다. 진료비 지출의 낭비를 막지 못한다면 보험료 인상이나 국고지원 확대의 효과가 반감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진료비 지출 낭비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행위별수가제라는 진료비 지불제도이다. 이 제도는 의료공급자로 하여금 의료서비스 제공을 증가시키려는 유인을 갖게 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고가의료서비스, 약제비, 의료기관 방문 등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3.. 건강보험을 바꿔야 한다

1) 형평성의 잣대 도입이 필요

먼저 건강보험제도의 수행정도를 평가할 때 ‘형평성’의 시각이 도입되어야 한다. 현재 건강보험이 보험료 부담이나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달성하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 경과에 따라 형평성은 개선되고 있는지, 형평성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는 기전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어야 건강보험제도가(또는 의료보장제도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어떤 도움을 얼마나 주고 있는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보장성 강화가 우선적 과제

현재 건강보험제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보장성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고액진료비로 인한 진료비 부담, 그리고 이로 인한 빈곤화의 악순환을 끊는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2004년 7월부터 본인부담상한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현재 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로 인한 진료비를 상한제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이다.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급여를 대상에서 제외하면 상한제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상한제와 관련한 두 번째 과제는 소득수준에 따라 상한액을 달리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득이 낮은 사람의 상한선은 현재보다 훨씬 낮추어야 제도가 효과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 보장성의 두 번째 과제는 보험적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현재 의료서비스의 효과나 비용-효과가 입증되어 있으나, 단지 보험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있는 서비스(자기공명촬영, 초음파, 예방서비스 등)의 보험적용이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올해 건강보험 재정이 크게 개선되었으므로, 이제 보험적용 확대를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전혀 없다.

3) 진료비 지불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진료비지불제도 자체는 국민 개개인의 의료서비스에 단기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건강보험 재정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낭비적 지출을 줄이는데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행위별수가제는 보험재정의 효율적 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후불제 방식인 행위별수가제를 선불제 방식인 포괄수가제나 총액예산제로 바꾸어야 한다. 포괄수가제 시행을 위한 준비는 이미 다 이루어졌으므로 정부의 시행의지만 남아있다. 지난 김화중 장관이 포괄수가제 실행을 사실상 연기한 결정을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 포괄수가제 시행은 장차 총액예산제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래이다.

4) 공단의 가입자 보호기능이 확대되어야

아직도 많은 국민은 건강보험공단을 보험료 징수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공단이 가입자를 대리하고 보호하는 기능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단이 가입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강화해야 한다. 이사회나 형식적인 위원회 구조를 넘어서는 참여 통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재정파탄 과정에서 공단의 보여준 무기력과 무책임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이는 건강보험제도 운영에서 공단이 가지고 있는 권한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단의 자율성 강화와 이에 따른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4.. 건강보험을 지켜내야 한다

건강보험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가 보건부문에도 불어닥치고 있다. 의료시장개방, 경제자유화구역내 영리법인 설립과 내국인 진료 허가 등은 필연적으로 민간보험 도입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장제도의 수준에서 민간보험이 도입된다면(보충형 보험이든 대체형 보험이든 상관없이) 이는 건강보험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나라 의료제도 전체에 회복 불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문제는 이를 ‘반대’하는 것말고는 이를 막을 방법이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유일한 방법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여 현재의 건강보험으로 국민의 의료욕구의 상당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국민이 건강보험을 지켜내야 할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