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동운동에게 주어진 이중의 과제

사회보험은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공적 사회제도이다. 노동운동이라면 당연히 사회보험강화투쟁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극히 당위적인 투쟁이 현실에서는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특집 글에서 ‘왜 사회보험인가?’라는 총론이 등장해야 하는 것도 우리가 처한 당위와 현실의 괴리를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우선 노동운동이 사회보험강화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의 경우 1995년 창립 이후 줄곧 사회개혁, 사회보험 강화를 핵심 사업으로 설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0여년의 역사와 70만 조합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내셔널센터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조합원의 대부분도 사회보험을 사회연대원리에 의한 소득재분배제도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세금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강하다. 특히 대기업 노동자의 경우 다양한 기업복지급여가 제공됨에 따라 공적 사회보험에 대하여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물론 우리나라 사회보험제도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지닌 탓도 있다. 사회보험이 권위주의권력에 의해 도입된 까닭에 애초에 사회보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지 않았다. 급여의 불충분성, 보험료부과의 공평성 논란, 저소득계층에 대한 강제 징수 등 사회보험제도로서 치명적인 허점도 많다. 게다가 한국사회에 과잉화된 시장논리에 의해 민간보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이 상당하다.
이렇게 노동운동 주체의 한계와 사회보험제도의 결함으로 인하여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궤도에 서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일부 산별연맹, 중앙조직의 실무간부들, 사회보험관련 사회단체들이 선도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노동운동은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조직적 체계를 강화하는 과제와 사회보험제도의 결함을 개혁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2. 사회보험: 노동시장 위험에 대처하기

1) 노동자의 노동권투쟁

봉건적 신분예속과 착취체제를 타파하며 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신분 평등’, ‘재산 소유권’을 선사하였다. 천년의 암흑을 걷고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듯 했다.
이 환상은 곧 무너졌다. 자본주의시장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만을 지닌 노동자의 만남은 애초에 평등하지 못했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물건을 생산해 내지만, 부유해지는 사람은 사용자들이고, 더욱 커지는 공장 역시 그들의 재산이었다. 노동자가 지닌 노동력은 자신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생산비(노동력재생산비)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특수한 상품일 뿐이었다. 게다가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가 제값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것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주의가 선보인 새로운 역사는 노동자가 일을 할수록 자신은 가난해지고 자본가는 더욱 부유해지는 요지경의 사회였다.
결국 노동자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가지고 노동시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불평등을 절감하였고, 운 좋게 고용되더라도 노동과정에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 이 저항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자본은 노동자가 어떠한 모임도 결성하지 못하도록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였고, 아무런 노동보호제도가 없던 상황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되어 매장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억눌림과 저항이 100여 년 이상 계속되었다. 수많은 투쟁도 이어졌다. 마침내 19세기 중반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을 뿐 교섭권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단체교섭권을 얻어 낸 것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일로서 다시 반세기가 걸렸다. 이어 다시 수십년이 지나서야 노동자들은 단체행동권을 인정받아 파업에 따른 면책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2백여 년의 투쟁을 통해 20세기 들어 ‘노동권’이 사회적 권리로 정착된 것이다.

2) 노동시장 위험에 대처하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은 자본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이다. 이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권을 얻었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노동권만으로는 노동력재생산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권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가 완전한 노동력을 유지할 때에만 행사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산업재해를 당한다면, 질병을 앓는다면, 실업을 당한다면, 노년에 도달한다면,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어 생계 자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위험을 벗어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했다.
누구든지 노동시장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개연성은 사전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산업재해, 질병, 실업, 노령 등의 ‘노동시장 위험’을 해결하여 다시 노동시장으로 복귀하거나 기본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결국 사회적으로 노동시장 위험을 대처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력 퇴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산재보험, 의료보험, 고용보험, 연금보험 등 사회보험이다.
이때 사회보험은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계’, ‘민간보험’과 다른 원리에 의해 설계되었다. 민간보험이 단순히 개인위험을 다수의 가입자에게 분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 사회보험은 위험을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소득재분배 기능을 핵심항목으로 결합시킨다.
민간보험에서 보험료는 가입자가 선택한 ‘보험상품’에 의해 정해진다. 가입자는 자신이 임의로 보험상품을 선택하고, 그에 의거하여 보험료를 납부하고 이후 급여를 지급받는다. 보험상품에 따라 지급체계가 다소 다르겠지만, 보험급여액은 시장의 원리에 의거하여 기여분만큼 되돌아온다. 즉 재원 기여분과 급여 수혜액이 비례한다.
그러나 공적인 사회보험은 모든 국민이 가입하는 포괄보험이며 보험료와 급여혜택을 연계시키지 않는 보험이다. 사회보험의 기본원리는 보험료수준은 납부능력에 따라, 급여수준은 필요수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즉 보험료는 가입자의 납부능력(소득)에 따라 상이하게 정해지고, 보험급여혜택은 보험료를 많이 내었든 적게 내었든 사회보험 규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즉 보험료 결정원리와 급여결정원리가 독립적인 것이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원리이며 사회연대성을 반영한다.
결국 사회보험의 핵심원리는 부등가교환에 있다. 계층별로 버는 만큼 내고, 필요한 만큼 지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위험을 분산하고, 동시에 부의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보통 교육, 의료, 주거, 경로 등이 사회복지로 지칭되는 이유 역시 부등가교환에 있다. 등가원리는, 언뜻 보면 공평한 것 같지만,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전제로 한 것으로 기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반면에 사회보험이 기초한 부등가원리는 민중의 필수적 삶을 보장하면서 시장이 낳은 부익부빈익빈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평등지향적이다. 부등가교환, 그것은 불평등한 계층상태에 맞서 평등성을 회복하려는 ‘사회연대 교환’인 것이다. 따라서 부등가성이 클수록 소득재분배효과는 크다.

3. 사회보험과 노동력재생산

노동운동의 사회연대적 부등가교환투쟁은 사회보험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보험은 광의의 사회복지투쟁의 일부이다. 이제 전체 노동력재생산체계를 포괄적으로 검토해 보자.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력재생산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복지를 통해서 얻는 혜택이다. 만약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재생산의 재원을 모두 ‘임금’이라고 부른다면, 전자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여 고용주로부터 직접 얻는 시장임금(market wage)이고, 후자는 노동자가 국가를 통하여 얻는 사회임금(social wage)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재생산을 주관한다는 점에서 전자를 개별적 재생산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는 사회가 노동자의 재생산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재생산이다.
사회임금은 국가를 통해 얻는 집단적 급여이다. 이때 국가가 지급하는 급여는 사회보험과 비사회보험방식(기초생활보장, 아동수당, 공공주거 등)이 있다. 사회보험은 일정한 보험료를 국민이 납부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사회임금이고, 후자는 조세를 통해 재원이 마련된다.
시장임금의 형식도 매우 다양하며 일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기업복지의 경우 비록 개인수준을 넘어 기업단위에서 주어지는 복지이지만 기업간 편차를 그대로 반영하므로 노동자내부 분할을 강화하는 시장임금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최저임금의 경우도 국가가 최저임금을 정하지만 결국 기업으로 받는 개별노동자의 직접임금으로서 시장임금에 속한다. 단 최저임금의 경우 가장 취약한 노동자의 기본임금 확보를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고, 노동자내 임금격차 해소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큰 시장임금이다.

노동력재생산과 사회임금 구조

4.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사회운동적 의의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고용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임단협투쟁을 전개해 왔다. 임단협투쟁은 현장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고 개별 조합원을 조직하는 노동조합의 기본활동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용조건이 임단협투쟁만으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특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동시장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회보험강화투쟁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번 실업을 당하거나, 중병을 앓거나, 산재를 당하면 사실상 정상적으로 노동시장에 복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국민연금파동에서 확인되었듯이, 노동자, 서민의 노후도 불안하기만 하다. 2~30년 이상의 장기간 동안 노후빈곤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시장의 위험에서 노동력재생산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투쟁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결론을 대신해서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사회운동적 의의를 요약해 보자.
첫째,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통해 시장임금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평등효과’를 가진다. 현재 우리나라는 규모별, 정규직/비정규직간 시장임금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보험을 확대하는 것은 노동력재생산에서 사회임금의 비중을 늘리면서 노동자내부의 소득격차를 완화시키는 평등효과를 낳는다. 물론 사회임금을 통하여 노동자 내부의 분할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하여 노동자내부의 분할을 극복하는 운동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째, 사회보험은 재원부담의 책임, 수혜급여의 수준 등에서 계급계층간 이해관계를 확연히 구분해 준다. 사회보험의 재원을 누가 얼마만큼을 부담할 것인지, 급여수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계급간 이해가 상충한다. 고용보험, 산재보험의 사용자 부담 보험료 인하, 국민연금 급여 축소, 기업연금제 도입 등은 자본에게 이로운 정책이다. 반면에 건강보험료 사용자 부담금 확대, 건강보험 급여 확대, 고소득자 연금보험료 인상 및 연금급여 상한제 등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제도이다. 이렇게 사회보험제도 개혁방향을 둘러싼 갈등은 계급간 이해관계를 선명히 보여주고, 계급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셋째,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정부정책, 입법안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대정부, 대국회투쟁이 수반되며 그만큼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우리나라 정치구조에서 현실의 계급적 이해를 담은 의제들이 정치쟁점으로 자리잡지 못해 왔다. 현실의 계급적 쟁점을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는 데 있어 사회보험은 중요한 의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건강보험 재정통합,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에서 그 위력은 증명되고 있다.
사회보험강화투쟁은 노동자가 처한 노동시장의 위험을 사회화하는 생활권투쟁이며, 동시에 평등효과, 계급효과, 정치효과를 지니는 중요한 노동운동의 의제이다. 이제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