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료시장개방의 쟁점
보건의료서비스 분야에 대한 WTO 협상의 주요 쟁점을 서비스 공급형태별로 살펴보면, 크게 ‘국경간 공급’, ‘해외 소비’, ‘상업적 주재’, ‘자연인의 이동’ 등 네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국경간 공급’에 해당하는 Mode 1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공급되는 서비스를 의미하며, ‘해외 소비’에 해당하는 Mode 2는 소비자가 다른 국가에서 이용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상업적 주재’에 해당하는 Mode 3은 외국회사가 다른 국가에 자회사나 지사를 설립하여 공급하는 서비스를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자연인의 이동’에 해당하는 Mode 4는 개인이 다른 국가로 이동하여 공급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이 중에서 Mode 3이 주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서비스 분야를 보면, 외국의 민간병원이 영리를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외국의 민간보험회사가 우리나라 및 외국계 의료기관과 계약을 체결한 후 보험가입자에게 현물급여를 제공하는 서비스 공급형태를 들 수 있다. 또한 외국의 의료인이 우리나라에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영업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형태를 포함한다. 외국계 자본의 우리나라 의료기관에 대한 인수 합병, 체인 병원의 개설과 합동관리 등도 Mode 3에 해당하는 공급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형태는 비의료인 또는 영리법인에 의한 의료기관 개설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현행 의료법에 배치된다는 점 때문에 의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 예상된다. 또한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건강보험의 급여범위를 제한하고 민간보험을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커질 것으로 보이며, 건강보험법의 당연지정제를 개정하라는 요구 등도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무역의존도가 73%를 넘는 상황에서 WTO 다자간 무역협상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추계에 의하면 DDA 협상으로 인하여 1.2%의 GNP 증가 요인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에 비추어볼 때 농업, 수산업, 경쟁력이 취약한 일부 서비스 분야의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칠레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에서 경쟁력 있는 공산품의 수출에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농산물을 포기하였듯이 다른 서비스 분야에 유리하면 보건의료서비스 분야를 양보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외국인투자촉진법에서 투자금지 조항이 폐지되고 외국투자자에 대한 대외송금을 보장함에 따라 이와 상충하는 의료법 개정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보건의료분야에서 영리법인 관련 규정은 주로 의료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의료법 제 44조의 규정에 의하면 의료법인은 민법 중 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영리법인의 의료기관의 개설을 제한하고 있다. 1995년부터 국내 의료기관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였지만, 국내의료인 면허를 소지한 자, 국가/지방자치단체, 의료법인 또는 비영리법인만이 의료기관의 설립이 가능하므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자본의 투자가 불가능하고 해외로 과실송금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약사도 약사법에 의하여 의사와 동일한 규정을 받고 있는데, 약사법 제16조 ①항에서 국내 약사, 한약사 자격증 소지자만이 약국을 개설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비약사의 약국 개설을 금하고 있다. 병의원과 마찬가지로 약국 개설에 있어서도 시장접근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DDA 협상 과정에서 영리법인을 인정하지 않는 관련 법규의 개정 요구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제출한 양허요구안을 보면 보건의료 분야에 한정한 양허요구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분야별 협상이 아니더라도 주식취득, 토지취득, 최저 투자자본, 지사설립 등의 제한 철폐 등과 같이 수평적 접근을 통한 협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 등 의료자본이 강한 선진국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영리법인 인정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자유무역협정 등 쌍무협상을 통해 영리법인 인정을 관철시켜 나갈 여지가 존재한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 움직임도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의료시장 개방과 민간의료보험 확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이지만, 시장개방 과정에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진출하고자 하는 외국계 병원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건강보험 수가 수준이나 관련 규제로 인하여 수익성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건강보험체계의 변화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외국계 보험회사는 국내 건강보험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의료계 일부도 고가의 진료 제공을 통해서 수익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2. 경제자유구역과 의료시장개방
경제자유구역 또는 경제특구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 자유수출지대(Free Export Zone), 수출가공지역(Export Processing Zone)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는데, 중국이 개방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국제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일반적으로 경제특구는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고 각종 규제 및 세금 등에서 예외를 인정하는 특별지역을 의미하는데,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특구를 지정, 자원 집중과 시장경제 확산의 전진기지로 삼아 경제․사회 전체적으로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홍콩 등도 국가 전역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삼아 발전해 온 사례에 해당한다.
최근 경제자유구역 내에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앞서 살펴본 의료시장개방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애초에 경제자유구역 내에 외국인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문제는 상주할 외국인의 생활 편의를 도모할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싱가포르와 같이 의료를 적극적으로 산업화하여 동북아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허브로 발전시킨다는 논리로 발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의 유명 병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하여 시장 개방에 장애가 되는 관련 법,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만약, 의료기관 개설 목적이 거주하는 외국인의 생활 편의시설 제공이라면, 굳이 큰 병원을 새롭게 지을 필요 없이 예외규정을 통해 건강보험 및 국내 보건의료체계에서 진료가 이루어지도록 하면 된다. 또한 해당되는 외국인의 의료수요가 대형 병원이 들어와야 할 정도로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클리닉 정도의 의료기관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병상 규모의 외국인 대형병원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은 편의시설 제공이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외국의 유명 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이윤 추구를 보장하기 위하여 건강보험과 무관하게 진료비를 받을 수 있으며, 영리법인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경제자유구역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병의원은 경쟁 상대인 외국계 병원에게 내국인의 수요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형평성 논리와 경쟁력 확보라는 논리로 영리법인과 민간보험의 전면 도입을 요구할 것이고, 보건의료체계의 사적 성격이 더욱 더 강화될 것이 확실시된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 때문인지 정부는 점차적으로 외국인 의료기관의 개설 목적을 편의 시설 보장에서 동북아 허브병원 구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조차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점 투성이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동북아 허브병원 구상은 타국에 비해 기술적으로 뛰어난 국내의료기술을 발판으로 동북아의 환자를 끌어들이고 물류 뿐 아니라 서비스의 중심 기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언어 문제 등 의료기술 외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 수요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과 외국계 간판을 걸더라도 전문 인력이 이동하지 않은 조건에서 한국인 의사 중심의 허브 병원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 가능성이 떨어지는 안이라 하겠다. 더욱이 동북아 허브병원을 만들지 않더라도 현재 국내 의료기관 내에 외국인의 환자 진료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결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동북아 허브병원 건립은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며, 국내 병원이나 기업에서 진출하든, 외국계 병원이 진출하든 주요한 환자층은 내국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확실한데도 동북아 허브병원이라는 허울로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을 위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영리법인 인정을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정부의 동북아 허브병원 주장과 경제자유구역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외국계 병원 유치 및 영리법인 도입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주장이며, 실제 목적에 합당한 실효성이 없는 주장일 뿐이며, 오로지 WTO 시장개방의 mode3에 해당하는 상업적 주재를 가로막는 관련 법규 및 제도를 제거하는 효과만을 갖게 될 것이다.
3. 의료시장개방이 보건의료에 미칠 파장
공공의료체계가 확립되고 비영리 민간병원의 공공성이 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리법인의 인정을 포함한 의료서비스시장의 개방은 국내 의료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적으로 과잉 공급의 문제를 파생시키고 의료기관간의 경쟁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급 과잉은 필연적으로 의료기관의 도산으로 이어지게 되고, 시장이 좁아진 민간병원은 공공의료의 영역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민 의료비가 더욱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이 예상되고, 필수적인 진료서비스보다 부가적인 의료서비스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의료의 질 측면에 있어서도 불균등성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소득계층간 불형평성 문제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전반적인 의료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지게 될 경우 저소득계층의 미충족의료(unmet need)가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리법인의 인정을 선두로 해서 진행될 의료시장개방은 영리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문제를 더욱 확대 심화시키는 결과를 파생할 것이고, 미약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자유구역 내에 국한하더라도 영리법인 허용을 포함한 의료시장개방은 수용하기 어렵다.
만약 의료시장개방을 허용해야 한다면, 비영리 민간병원에 대한 공공적 규제가 획기적으로 강화되어 영리적 행태가 제어되고 공공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공공의료가 획기적으로 확충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며, 병상 규제와 의료기관 개설 허가 요건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영리법인의 허용은 현재의 사적의료체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의료기관의 내국인 진료 허용과 영리법인 인정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도 실현 가능하지 않으며, 의료체계에 미치는 파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지금은 이렇게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 때 밝힌 공공의료 30% 확충을 실현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