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용서하고 잘 망각하는 사회

지난 몇 십년간 샌 호아킨 계곡, 구스틴 마을의 낙농업은 포르투갈계인들이 주도해왔다.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여 번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는 일들이 빈번하였다. 이곳에서는 삶은 힘들고 잔인한 것이며 위험은 산재해 있고 죽음은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 사망하면 의례적인 장례가 이루어진 후,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 노인은 이 마을의 특징을 ‘잘 용서하고 잘 망각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바로 이 마을이 로이 허버트 주니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인 곳이다. 허버트는 특별한 임무가 부과된 검찰관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지방에서는 직업과 관련하여 사망하는 것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하여 결성된 순회 검찰단의 일원이었다.
그들의 방식은 간단하지만 논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지역 판사의 허가를 받아,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여 노동자를 죽인 사업주들을 기소하였다. “우리는 기업 경영 방식의 변화를 유도하려 했다. 우리는 ‘당근’이 아니라 ‘채찍’으로 변화를 유도하려 했던 이들이다.”라고 허버트는 말했다.

허버트는 이 마을에서 140km나 떨어진 새크라멘토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캘리포니아 주 전역에서 발생하는 산재사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 시간을 다 바쳤다. 그러던 중 2002년 말, 이 마을의 낙농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산재사망에 무디어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산재사망 건을 발견했다.
그 사건은 아귀타-파리아 낙농업 회사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 회사는 1700 마리 이상의 소를 키우는 낙농회사로 구스틴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낙농가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 회사에 고용된 멕시코 미등록 이주노동자 두 명이 소똥과 폐수로 가득 찬 구덩이에 빠져 익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부검 보고서는 사망한 노동자들의 힘겨웠던 삶과 죽음을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둘이 합쳐 8페니 10센트가 들어 있었을 뿐이었고, 폐에는 소의 배설물이 가득했다고 보고서는 기술하고 있다.

허버트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2003년 1월, 낙농업자가 왕이나 다름없는 이 마을에서, 회사의 가축지기와 경영자를 과실치사 및 기타 중죄로 기소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였다. 그 죄가 적용된다면 경영자는 최고 징역 5년을 언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구스틴 마을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산재사망으로 인하여 사업주가 형사 소추된다는 얘기를 드물게 듣기는 하였지만, 이 마을에서 그러한 예가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산재사망에 대한 모든 부담은 마을 주민들이 져 왔다. 회사의 경영자이자 부분적인 소유주이기도 한 패트릭 파리아는 지역 자율 소방대의 대장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마을 축제의 후원자였고, 축제 때는 그 낙농회사의 소들이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존경받는 이들이었다.”고 이 지역 신문 발행자인 윌리엄 마토스는 말했다.

마을 주민들이 보기에 정부의 개입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마을 주민 누구나 이 기소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팻 파리아는 사고 당일 목장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목장의 가축지기인 알시노 눈스는 매우 상냥했고, 사고로 죽은 노동자들이 건져 올려질 때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파리아의 친구인 토니 자비어는 “실정을 좀 안다면, 그를 기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허버트는 마을의 이러한 반응에 놀라고 실망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했고, 일부러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최전방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노동자를 죽거나 다치게 한 사업주를 기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이다. 1970년에 연방 산업안전보건법이 생기기 이전에 캘리포니아에는 자체의 작업장 안전 기준이 존재했다.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지역 판사들은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에 보다 강력한 집행력을 주기 위하여, 공론화된 산재사망 건을 활용해왔다.

연방법에 의하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여 노동자를 죽인 것은 경범죄에 해당한다. 최고형이 고작 6개월 징역이나 50만 달러의 벌금을 무는 정도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는 1999년에 끔찍한 정련소 폭발사고가 일어난 이후, 미국에서 최초로 이러한 범죄를 중죄로 다룰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최고 3년의 징역이나 1백50만 달러의 벌금형을 언도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모든 산재사망과 심각한 산업재해 건이 사업주를 기소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사된다. 이러한 조사는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의 특별한 부서에서 진행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전직 경찰관이다. 이들은 조사 결과 사업주가 고의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가 있다고 판단되면, 검찰에 기소를 의뢰한다.

연방법에서는 사업주 기소가 가능한 경우를 매우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아주 심각한 산재사망의 경우에도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뉴욕타임스에서 자체적으로 지난 8개월 간의 산재사망 건을 살펴본 결과 매우 적은 경우만이 연방 직업안전보건청에 의하여 기소가 의뢰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캘리포니아를 제외한 다른 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캘리포니아 주만이 유일하게 보다 많은 사업주를 기소하고 있다. 동시에 캘리포니아 주는 산재사망률이 다른 주에 비하여 유의하게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통계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루어진 기소는 대부분 로스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등과 같이 판사들이 정치적 의지가 있는 대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시골의 작은 지역에서는 지역 판사들이 이와 같이 기술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기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로이 허버트와 순회 검찰단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순회검찰단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새크라멘토의 캘리포니아 지역 판사 연합 사무실에서 개일 필터 검사의 지휘를 받으며 일한다. 필터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부지역판사로 근무하였는데, 1999년 34개 지방에서 환경법의 집행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판사들을 도울 프로젝트가 개시되자마자 참여한 인물이다. 그 이후 그는 프로젝트의 영역을 산업안전 쪽으로까지 확장하였고, 어느 인터뷰에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같이 권력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큰 포부도 가지고 있다. 그는 산재사망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법 집행을 하고 싶어 했다.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 범죄 조사관들의 도움을 얻어 이 프로젝트팀은 몇 건의 산재사망과 관련된 범죄를 성공적으로 기소했다. “나는 체제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필터 씨는 말했다.

열정을 발견하다

로이 허버트는 63세인데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기도 하였고, 그 이후 검사와 변호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산업안전보건법의 확장 발전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이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변호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법과 과학에 동시에 흥미를 느꼈기에 이 영역에 매력을 느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진 후에는, 이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안전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북부 캘리포니아의 조지아 퍼시픽 기계 공장에서 안전관리자로 일했다. 조지아 퍼시픽 회사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회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아 퍼시픽 회사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을 때의 느낌을 회고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실수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사망한 노동자의 미망인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의 거대 로펌인 리틀러멘델슨 법률회사의 변호사로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대기업을 변호하며 명성을 쌓았다. 리틀러멘델슨 법률회사는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 조사관들이 ‘히틀러 무솔리니’ 법률회사로 부르곤 하는 로펌이다. 허버트 씨는 “그들은 끈질기고 놀라운 변호사들이죠”라고 말하고 웃으며, 이 로펌에서의 경력이 다소 부조화스럽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방황이 일생에서 가장 좋은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안전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경험하여 왔다. 그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업주와 변호사가 사용하는 다양한 속임수와 방법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로펌에서 돈을 더 벌기 위해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를 선택했다. 허버트 씨는 2002년 12월부터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구스틴 마을의 산재사망은 그가 선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구덩이에서의 질식사

구스틴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호세 알라토레는 2000년에 시간당 8달러 75센트의 급료를 받는 용접공으로 파리아 낙농회사와 계약했다. 그는 낙농회사에서는 처음 일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단지 일하면서 뒤집어쓰게 되는 소똥을 싫어서 퇴근 후 곧바로 몸을 씻곤 했다. 2001년 2월 22일은 그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부인인 안젤리카 아케베도 알라토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이 아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은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게 그가 포옹해 주었다.”고 부인은 회상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오늘과 같은 행복이 내내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결혼 선물로 반지를 끼어주고 출근했다. 그날 아침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면서 아침을 보냈고, 식탁을 차려 놓은 후 밖에 나가 남편을 기다렸다. 그 때 그녀는 의료용 헬리콥터 한 대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낙농회사에서 매일 배출되는 엄청난 양의 소똥과 오폐수를 처리하는 문제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귀타-파리아 낙농회사에서 이러한 오폐수는 펌프를 이용하여 개펄에 버려졌다. 그날 아침 오폐수 배출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개펄 옆의 구덩이에 있는 펌프에 이상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노동자가 이상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구덩이에 내려가 보자고 제안했다. 목장 운영에 책임을 지고 있었던 가축지기 랄프 눈스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으나, 그에게 로프와 더불어 두 명을 더 데리고 내려가 보라고 하였다. 구덩이의 깊이는 30 피트 이상이었다. 거기에는 사다리도 없었고 손잡이도 없었다. 구덩이 바닥에는 소똥과 소변 과 온갖 종류의 오폐물이 가득했다.

29세인 엔리케 아라이사가 맨 처음 내려갔다. 그는 몇 분 후 올라와서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세 알라토레도 살펴보기 위하여 내려갔다. 그는 산소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바로 구덩이에 빠졌다. 동료가 곧바로 로프를 던졌다. 동료는 첨벙거리면서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조사관들에게 증언하였다. 로프가 팽팽해진다고 느껴졌다. 아라이사 씨가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구덩이로 들어갔다. 그러나 구덩이를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부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오물에서 발생한 황화수소 가스가 그들을 질식시킨 것으로 추정되었다. 의료용 헬리콥터가 도착했을 때는 죽은 후 오래된 상태였다. 15분 후 안젤리카 알라토레의 아파트 전화기가 울렸다.

운명인가, 타살인가?

구스틴 마을은 늘 그래왔던 방식대로 장례를 치렀다. 패트릭 파리아는 유족을 방문하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안젤리카 알라토레는 회상하였다. 그는 장례비용과 시신을 멕시코로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마을에서는 성대한 식사와 술대접이 이루어졌다. “팻 파리아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찾거나, 그에게 받아낼 것이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하겠지만, 헛수고일 것입니다.”파리아의 친구가 말했다.

52세인 파리아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어린 시절, 소젖을 짜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던 것을 얘기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위하지만, 독립적이기도 한 자신의 윤리적 성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자신의 성향을 설명하는 동안 친구가 끼어들었다. 그는 목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위험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하였다. “아무도 그들에게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서 냄새를 맡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을 나는 10번도 더 했다. 그 날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내가 내려갔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구스틴에 있는 다른 낙농회사에서 무너진 벽에 깔려 사망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다 운명인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말했다. 팻 파리아에게 사건과 관련된 질문을 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나쁜 거래의 일종이다. 나쁜 거래이다. 그러나 다른 여지가 없다.”

기소의 정치학

로이 허버트와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는 지방 판사의 허가 없이는 사건을 더 진행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공화당 출신으로서 그 지역의 지방 판사로서 5선을 기록하고 있는 고든 스펜서 판사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일 필터는 설명하였다.

스펜서 판사는 지역의 유지이며 영향력 있는 낙농가의 경영자를 기소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그가 그 지역에서 27년간 판사로 일하는 동안, 산재사망을 이유로 사업주의 기소를 허가한 예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 지방 사람이 아닌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 씨는 캘리포니아 지방 판사회의 전 회장으로서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를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의 지역에서는 21명의 판사가 일 년에 4,300여 건의 중죄를 다루는데, 환경이나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판사는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하며 이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아 건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다. “나는 이 지역에서 이 산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건은 기소되기에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안전 문제 해결의 위급성을 알리듯이, 2002년 8월 구스틴의 다른 낙농회사에서 비슷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 및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질식 사고가 발생했다. 로이 허버트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때는 더 이상 낙농회사가 문제를 ‘운명’에 맡기기를 그만두어야 할 시점이었다.

2003년 1월, 허버트는 파리아 건을 지역 법원에 회부했다. “만일 당신이 농사에 대해, 특별히 낙농업에 대해 조금만 아신다면, 소똥이 치명적인 가스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기소이유서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암모니아, 황화수소, 메탄가스 등을 발생시킵니다. 이러한 가스가 밀폐된 공간에 존재한다면,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가스가 됩니다.”
캘리포니아의 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사업주는 노동자가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의 의무를 지고 있다고 18명의 배심원들에게 설명하였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게다가 팻 파리아는 이러한 위험과 안전보건법의 의무사항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자율 소방대원으로서 교육을 받은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99년에 파리아 씨에게 4시간에 걸쳐 ‘밀폐 공간에서의 주의 사항’을 교육한 강사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리고 파리아 씨가 시험을 보아 통과된 답안지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증거는 더 존재했다. 팻 파리아의 농장에는 문서로 된 안전 계획이 있었다. 이는 캘리포니아 산업안전보건법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안전 계획서에는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는 것의 위험성과 소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독가스에 대한 모든 것이 언급되어 있었다.

기소이유서를 마치면서 개일 필터는 무시된 안전 수칙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기 테스트도 없었으며, 필요한 장비도 없었고, 사다리도 없었다. “위험 표지를 붙여놓고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기껏해야 백 달러를 넘지 않는다. 이것을 아끼기 위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두 노동자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아주 적은 비용으로도 피할 수 있는 불행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만 지켜도 한 달에 8만 5천 달러의 돈을 절약할 수 있다”

호세 알라토레의 부인에게 이 기소는 위안이 되었다. 남편의 불행이 다른 이들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무엇을 더 생각할 게 있나요? 그들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은 파리아가 모든 것을 잃을 거라고 말해요. 하지만 그가 잃을 것은 단지 돈이예요. 나는 남편을 잃었어요. 그는 돈을 잃었지만, 나는 남편을 잃었어요. 아들이 ‘아빠는 어디 있어?’ 물어올 때 내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나는 ‘네 아빠는 여기 없단다’ 말하겠죠. 아들은 ‘우리가 거기로 갈 수 있나요?’ 물을 거예요. 나는 혼자 울어야겠죠.” 그녀는 말했다.

엔리케 아라이사의 어머니는 호세 알라토레를 돕기 위해 노력하다 같이 사망한 아들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한숨을 쉬며 울먹일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어떠한 노력도 내 아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지는 못합니다.”

기소에 따른 결과

얼마 되지 않아 고든 스펜서는 이전에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낙농업자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듣게 되었다. 스펜서 판사는 그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로이 허버트 역시 적지 않은 반발을 경험했다. 구스틴에서 30마일 떨어진 모데스토의 유대인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그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낙농업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스펜서는 정치적 기술을 발휘하여 반발에 대응하려 노력했다. 기소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낙농업자 모임인 서부낙농업자연합 대표를 불렀다. 낙농업자 대표는, “진심으로 놀랐다. 이번 사건은 일종의 불행일 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그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실망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서부낙농업자연합은 서둘러 위원회를 열어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고 다른 낙농업자 모임에도 사실을 알렸다. “이와 같은 결정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이런 예는 없다.”

팻 파리아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대모인 매들린 파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아들이 징역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들은 매우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들은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농장 문을 닫고 모든 노동자들을 돌려보낸 뒤, 우리 농장을 다른 이에게 빌려주었다. 허버트 씨는 왜 이렇게 우리를 못살게 구는가”

파리아의 형은 기소 결정에 분노하며 경멸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는 스스로 명예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구스틴 마을에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었다. 구스틴 마을에서는 로이 허버트와 그의 동료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 어떤 인쇄물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소 결정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이전에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낙농가에서는 안전에 대한 광범위한 점검이 이루어졌다. 안전관리자를 고용하고, 안전 교육을 실시하며, 위험 표지 및 안전 도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은 파리아 농장에 16만 6천 6백 50달러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것은 꽤 높은 액수이다. 직업안전보건청은 구스틴 마을의 160개 이상의 농장을 방문하여 50만 달러 가량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무료로 안전에 대한 자문을 해 주었다. 파리아에 대한 기소와 직업안전보건청의 조사, 자문, 교육 등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낙농가에서 안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업주에 대한 기소 행위가 가져온 크나큰 변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