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와 축구, 룰라

우리가 브라질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라면, 아마존, 삼바와 축구, BRICs로 총칭되는 신흥경제 개발국, 노동자당(PT)과 룰라, 그리고 포르투 알레그레 정도가 아닐까 싶다1). 그러나 한국과 브라질, 두 사회는 정 반대의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군사독재,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뒤이은 경제위기 등 상당히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라질의 노동자 건강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당연하다. 우리가 투쟁의 기록을 영어논문으로 국제학술지에 출판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의 기록도 포르투갈어로 쓰인 보고서, 선전물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원고는 제한된 (영문) 자료들을 토대로 브라질의 일반적 상황을 간단히 개괄하는 데에 머물 것임을 미리 밝힌다.

최악의 불평등과 노동계급의 성장

브라질은 남한의 85배에 해당하는 넓은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남미의 대국이자 인도, 중국, 러시아와 함께 세계 경제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표적인 신흥경제개발 국가이다. 한편으로는 식민 지배의 아픈 과거를 가진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사회 불평등과 빈곤 문제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기도 하다. 2003년 통계에 의하면 지니계수 2)는 59.1에 달하며, 최고 소득자 10%가 벌어들이는 돈은 최저 소득자 10%의 85배에 이르는 등 불평등 수준은 거의 세계 최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 빈곤층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브라질의 역사와 경제개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브라질의 경제개발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에 독립한 이래 본격적인 산업자본의 형성은 19309년 혁명(쿠데타)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당시 바르가스(Getúlio Vargas) 대통령은 민족주의와 조합주의를 토대로 강력한 중앙 집중식 국가 투자를 주도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운동의 탄압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국가가 흡수했고, 이렇듯 강력한 국가 통제 속에서 노/자는 “평화”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1945년 2차 대전의 종료와 함께 바르가스의 신 국가체제(Estado Novo) 5)가 끝나면서 민주화 시대가 열렸고(45~64년), 이 시기에는 국제 투자의 확대 속에 유급 노동과 다양한 생산 조직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바야흐로 근대적인 노동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20년 간 이어진 군사독재 기간(64-84)에는 고도로 집중화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70년대에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경제 팽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80년대 세계 경제의 침체와 이에 따른 브라질 생산 부문의 침체는 임금구조와 노동 조건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은 노동조합이 풀뿌리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의학과 연방 인간공학기준을 위한 투쟁

20년간의 군사독재가 종식된 후 1988년에 새로운 연방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브라질 역사상 처음으로 건강을 “사회권”으로 명시하였다. 이로부터 노동안전보건이 보건의료의 공식 영역으로 포함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다양한 사회 진보세력, 특히 강력한 노동운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폭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회의학(Social Medicine)”과 ”집단 보건학(Collective Health)”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노동보건 서비스의 시행과 관리, 평가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점이다. 이 결과의 하나로, 이전까지 은폐되어 있던 산업재해, 작업관련 건강문제들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6) 이를테면,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이 설립한 노동자 건강 문의 센터(Reference Center for Workers’ Health; CRSTs)를 통해 직업성 질환에 관한 진단과 치료, 감시체계를 도입하면서 85년 3천 건이던 직업 관련성 질환이 91년에 1만 5천 건으로 늘어났다. 7)
1990년에 제정된 연방 인간공학 기준(Federal Ergonomic Standard)은 노동자 건강 운동이 낳은 또 다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이래 주로 정부 부문과 은행 등에 고용되어 있던 자료입력 노동자들은 역학조사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근골격계 질환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8) 전국 조직을 통한 투쟁은 물론 전문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새로운 건강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은, 작업장에서 적용 가능한 직업병 예방 법을 배우고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조는 단체 협약에 이러한 조치를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사업주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연방 규제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아가 이 문제가 다른 업종에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전반적인 인간공학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6년 이상의 투쟁을 거치면서, 1987년에는 근골격계 질환 노동자에 대한 보상급여와 재활 치료에 대한 연방행정명령을 확립할 수 있었고, 1990년에는 노동부에 의해 연방 인간공학 기준이 공표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조는 강력한 70년대 노동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노동조합”을 주창하며 구내식당에서 작업 환경에 이르기까지 일반 노동자들의 일상적 문제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안전보건 문제들은 단체 협약의 협상안에 중요한 이슈로 포함될 수 있었다. 9)

땅 없는 노동자 운동

한편, 노동자 건강을 중심에 둔 운동은 아니지만 “땅 없는 노동자 운동(Landless Workers Movement, 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MST)”도 노동의 자율성과 통합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브라질은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약 3%의 인구가 전체 2/3에 해당하는 활용 가능한 농토를 점유하고 있으며 약 2500만 명은 전혀 농토를 갖지 못한 채 임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MST는 84년부터 시작되어 브라질 전역에서 현재까지 25만 가구가 참여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단순히 유휴 토지를 점유하고 농사를 짓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치조직을 갖추고 기존 브라질 사회가 제공하지 않던 (혹은 못하던) 공공서비스 10)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아동교육, 성인을 위한 문맹 퇴치 교실, 노동자에 대한 기술 교육 등은 노동계급의 역량 강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공동체는 자율적 생산과 조직화를 통해, 전 세계 공정 무역(Fair Trade)의 한 축을 이끌고 있으며 “또 다른 세계”로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11)

경제개혁 앞에 스러져가는 노동자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사례들, 최근의 눈부신 경제성장, 강력한 노동운동, 좌파 대통령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노동자들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전 지구적인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한 사업장, 한 지역,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르도수(Cardoso) 12) 집권 시절 MST 공동체의 상당수가 합법화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조정과 높은 이자율 정책 때문에 또 다른 수많은 소농들이 파산에 이르렀다. 또한 세계은행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안을 강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땅 없는 노동자들은 시장 가격으로 대출(18%의 이자)을 받아 농지를 구매해야 하며, 유휴토지의 판매 여부는 전적으로 토지 소유주의 마음에 달려 있다.13) 땅 없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소망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세계은행”, “경제개혁”이라는 괴물들 앞에 스러져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90년대 이후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규제 완화와 개방, 기업의 구조 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노동의 유연성 강조, 생산성의 극적인 증가가 나타났다. 이는 곧 전반적인 고용 축소, 실업률 증가(특히 여성과 젊은 연령), 비공식 부문 노동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다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브라질 전체 실업률은 89년 3.4%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99년 7.8%에 이르렀으며, 경제 중심 도시인 상 파울로(São Paulo)의 실업률은 무려 19.5%에 달했다.

최저임금이하노동자 20%, 악화되는 노동자건강

노동 시장에서의 공식 고용은 90년 99.7%이던 것이 매년 감소하여 97년 현재 8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산업 부문마다 차이가 커서 제조업(53.2%)과 전자통신(50.2%)의 경우 특히 비공식 부문의 비중이 크다. 또한 97년 현재 최저임금(미화 약 100불) 이하를 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20%를 차지했으며, 빈곤이 구조화되면서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차단되고 이에 따라 지속가능한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실업률 증가와 비공식 부문의 증가, 극심한 빈곤은 자연스럽게 아동 노동의 증대를 가져왔는데, 이를테면 가사노동(예, 하녀)에 종사하는 청소년(10~17세)의 비율은 85년 17.2%에서 95년 26.7%로 늘어났다. 14) 이러한 상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노동자 건강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일자리 자체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우선순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열악한 작업 환경이 방치되고 노동 강도가 강화되면서 작업 관련 사고와 질환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이루어진 연구 15)가 입증하듯, 비정규/불완전 고용으로 인한 노동안전보건의 폐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더구나 극심한 빈곤과 낮은 교육수준이라는 문제를 이미 가지고 있는 브라질 노동계급에게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건강한 노동자들이 “살아남고”, 통계수치에 반영되지 않는 비공식 부문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노동자 건강 수준의 악화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의제로 삼아 투쟁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 수준이 다르고, 정치적 상황도 다르지만 지구 반대편 브라질 노동자들의 문제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대목에서 새삼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지구를 휩쓸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응 또한 전 지구적 연대에 근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과 건강]의 이 연재가 연대를 위한 이해의 첫 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MST) 노래

1.이주민 행렬
브라질 대륙의 땅
우리 민중의 조국이여
오늘 그대에게 묻고 싶나니
그대 품이 그토록 크다면
그 품에 가정하나 이루려고
희망을 왜 거부하나요?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이 거대한 국토
땅 한 뼘에 아직도
죽고 죽여야 하다니
신작로 걸어 나온 농민들
울타리와 말뚝사이
가꾸는 이 한명 없고
버려진 땅 바라보며
아사냐 동냥이냐
수백만 무리지어 떠난다내

2.대지를 찾아 나선 민중의 끈
민중이여 참여하라
모든 이여 이 끈을 잡어라
소리쳐 부르는
내 송아지
범선타고 도착한 옛날 그들은
인디오의 땅을 가로채 나누었지
투쟁은 이미 시작 되었네
흑인 노예
까뽀에이라 춤
자유의 북소리
긴긴 밤 울려 퍼지네
태양과 달빛이 그 아름다움
우리 모두의 것이라면
대지 또한 우리의 것
우리 노동자들의 것
끊임없는 우리 행진
앞세운 깃발 휘날리며
ꡒ모두에게 토지를ꡓ

3.땅과 대지
땅과 대지
우리 삶의 동의어
투쟁의 명분이요 희망
하루하루 쟁취하며
이글거리는 장한 눈빛
대로변 검은 천막
의식과 투쟁의 징표
무장 억압자
의지 앞에 무릎 꿇네

각주)

1) 월간 조선 최근호에 “남미의 거인, 브라질”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가 실렸다. 노동건강연대와 월간 조선이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두 매체가, 전혀 다른 이유로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 소득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00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 2003년의 경우 스웨덴은 25.0, 미국은 40.8, 한국은 31.6이었다.
3) http://hdr.undp.org/reports/global/2004/pdf/hdr04_HDI.pdf
4) http://www.nis.go.kr/kr/include/branch.jsp?menu_id=M04050000
5)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6) Sato L, Castro Lacaz FA, Bernardo MH. Psychology and the Workers’ health Movement in the State of Sao Paulo (Brazil). Journal of Health Psychology 2004;9(1):121-130
7) Bedrikow B, Algranti E, Buschinelli JT, Morrone LC. Occupational health in Brazil. Int Arch Occup Environ Health 1997;70:215-221
8) 자료 입력 노동자 전국대회에서 이 결과가 발표된 것이 1984년인데, 당시에 브라질에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연구결과나 통계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9) Carvalho Barreira TH. The federal ergonomic standard in Brazil: its social historic process. New Solutions 2003;13(2):191-203
10) 의료서비스와 교육서비스가 가장 중요한데, 많은 공동체가 학교와 의료기관을 갖추고 있으며, 일부 지역의 경우 보건의료인 양성기관과 전문대학을 설립한 곳도 있다.
11) Mark J. Brazil’s MST: Taking Back the Land. Multinational Monitor Jan/Feb 2001 (vol 22)
12) 룰라의 전임 대통령(94-2002)이었으며 유명한 학자로서 종속이론의 전문가였으나 그의 집권 동안 공기업의 민영화가 급속도로 진척되고 빈부 격차는 더욱 극심해졌다.
13) Mark J. Brazil’s MST: Taking Back the Land. Multinational Monitor Jan/Feb 2001 (vol 22)
14) Ramalho JR. The Brazilian labor market in the 1990s: Restructuring, unemployment and informality. In: Amann E, Chang HJ (eds). Brazil and South Korea: economic crisis and restructuring.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School of Advanced Study, London 2004
15) Quinlan M, Mayhew C, Bohle P. The global expansion of precarious employment, work disorganization, and consequences for occupational health: Placing the debate in a comparative historical context. Int J Health Services 2001;31(3):507-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