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무상의료인가?
가.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무상의료의 필요성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질병․장애․배우자 사망․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결핍의 경우에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체 및 정신적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인류의 보편적 규범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상의 냉혹함 속에서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있다. 한 쪽에선 수백만을 호가하는 검진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수술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운 좋게 방송에 포착된 자만이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한 공로(?)를 인정받아 비극적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건강할 권리가 근본적으로 침해받고 있는 현실은 빈곤 심화 및 사회 양극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구조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통계청 도시가계 조사를 보면, IMF 이후 하위 1분위와 상위 10분위 간 소득점유율 비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1)
. 이러한 상황에서 절대적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잔여적 복지체계의 구축만으로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정책은 여전히 잔여적 수준의 최소 안전망 구축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의료이용의 불형평성과 건강수준의 불형평성이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료이용의 불형평성 문제는 건강보험의 이용 양태를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입원 진료비만 보면 하위 1분위와 상위 10분위 간에 차이가 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환의 특성에 따라 구분하면 그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급성질환의 경우 소득계층 간 차이가 크지 않지만, 2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가진 가입자의 경우 소득계층에 따라 의료이용에 차이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
소득계층에 따른 의료이용의 양극화 현상은 외래 이용 양상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2002년을 기준으로 건강보험 자료를 분석해보면, 하위 1분위에 비해 상위 10분위의 평균외래진료비는 직장 가입자의 경우 42%, 지역 가입자는 45%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양극화 현상은 연령구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0-74세의 노인만을 보면 상위 10분위의 노인이 하위 1분위의 노인에 비해 의료이용량에 있어서 직장 81%, 지역 68% 가량 더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인인구에서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것은 급격하게 노령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전면적인 보건의료체계의 개편이 없는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나. ‘의료산업화’ 공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무상의료’ 운동의 의미
작년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계속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의료산업화론’으로 정식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그것이다. 올 초부터 청와대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의료산업화론은 언론사 등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고, 급기야 보건복지부까지 의료산업화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공세의 고삐가 조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사안 자체가 경제자유구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사회진영의 연대가 수월하다는 점에서 작년보다 덜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공세의 강도에 비추어볼 때 수세적인 반대투쟁만으로 의료산업화의 공세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반대투쟁과 함께 현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전략과 계획이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상의료운동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상의료는 단지 공짜의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짜의료가 가능할 수 있는 체계 내지 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상의료운동은 현재 존재하는 시장 중심의 의료체계에 대한 대안 투쟁으로서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물론 무상의료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무상의료는 의료급여와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등과 같이 의료이용에 있어서 경제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국민들이 체감하고 있는 고통이 어떤 부분에 핵심적으로 닿아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무상의료에 대한 비판의 지점이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과정에서 확인된 국민들의 정서는 막연하게나마 무상의료가 매우 필요한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무상의료를 하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 개인이나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들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 갖고 있다. 또한 의료산업화의 논리와 맞닿아 있는 공짜가 갖는 부정적 이미지, 즉 의료의 질이 낮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상의료운동은 무결점의 자기 완결성을 내포하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의료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출발점으로서 또는 매개자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대안 운동이라는 점에서 행위 지향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운동 과정에서 현재 영리법인 허용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의료의 질 문제는 본인부담이 절반이 넘는 현재의 무권리 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이지, 서비스의 표준화와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되는 무상의료의 경우에 질 저하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일임이 실천적으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2. 보건의료의 현황과 문제점
가. 보건의료서비스 시장의 특성과 문제점
보건의료는 일반적인 상품과 달리 시장 논리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공적인 특성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다. 시장에 의한 상품의 거래와 자원 배분은 경쟁의 대칭성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할 수 있지만,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비효율적이 된다. 이것을 보통 ‘시장 실패’(market failure)라 하는데, 보통 시장 실패는 경쟁의 불완전성, 공공재적인 재화의 성격, 외부 효과, 수요예측의 불확실성, 정보의 비대칭성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건의료는 이와 같은 시장 실패가 일어나는 대표적인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시장실패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실패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 국가는 보건의료에 대한 공공적 개입을 강화하고 있으며, 선진외국의 경우 국가의 책임 하에 서비스의 공급 자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및 영리법인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정부적인 시장경쟁의 폐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가히 보건의료의 위기라 칭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보건의료의 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징후는 바로 부적절한 공급 과잉이다. 급성기병상과 첨단 고가 장비는 이미 과잉 공급 상태에 있고, 매년 수천 명의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와 대다수가 구매력이 있는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공급 과잉은 필수적인 의료의 과소 공급과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미충족의료’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특히 현 건강보험 수가와 급여항목이 의료공급자가 투자한 자본비용을 보전해주지 않고 경상비용만을 보전해주기 때문에 의료공급자들은 자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하여 비정상적으로 진료강도를 강화하고 비급여 항목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행위별수가제에 기초한 진료비지불제도가 이러한 진료강도 강화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무분별한 과잉 공급과 경쟁의 심화, 그리고 부적절한 진료 강도의 강화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불신으로 표출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3차 의료기관(종합전문요양기관)의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료자원의 합리적인 사용을 목표로 했던 의료전달체계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나. 보건의료서비스공급체계의 현황과 문제점
1) 민간 중심의 소유지배구조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건강의 불형평성 문제와 보건의료의 위기는 보건의료를 시장의 논리로 움직이게 만드는 보건의료의 구조적 취약성 내지 공공성의 부재에 기인한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민간 중심의 소유지배구조라 할 수 있다. 실제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공공부문 병상의 비중이 8.1%에 불과할 정도로 민간부문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부문의 비중이 극히 취약한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간병원의 대다수가 개인 및 재벌자본의 소유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형식적인 설립 형태만 보면 비영리법인의 형태를 띠고 있는 병원이 많지만, 실제적인 지배구조를 보면 법인 이사장이나 재벌 기업의 오너에 의한 개인 지배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비영리 민간병원은 자선적 성격이 강하고 대다수가 지역사회에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민간병원은 전형적인 이윤극대화 모형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2) 공급의 양극화와 비용유발적인 의료전달체계
또한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의원과 병원이 모두 외래와 입원 환자를 진료함으로 인해 양자가 동일한 시장 안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무정부성이 심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경쟁력이 취약한 1차나 2차 의료기관보다 3차 의료기관인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되는 ‘상방지향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규모의 경제에 못 미치는 소규모 병원은 생존을 위해 생산비용의 절감이나 매출의 증가를 부적절하게 강화하고 있다. 일반적인 시장 기전이 작동하기 어려운 보건의료 부문에서 이는 서비스 질 저하와 의료비 상승 등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2)
더욱이 의원, 병원, 대형병원 간에 의료전달체계가 형성되지 않아 막대한 양의 의료시설 및 의료 자원의 중복 투자와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 외국에 비해 한국의 의료전달체계는 매우 비용유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용유발적인 의료전달체계 하에서 자원의 배분은 매우 왜곡될 수밖에 없다. 도시에 대부분의 의료자원이 집중되고, 급성병상은 과잉인데 장기병상은 과소인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급성기병상의 공급 과잉은 최소한 도시 지역에 한정된 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농촌지역 의료기관의 병상 규모와 질적 수준을 고려하면, 농촌지역은 사실상의 공급 부족상태에 처해 있다. 이 과정에서 농촌지역 주민들이 도시지역의 보건의료서비스를 대체 소비하게 됨으로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촌지역이 오히려 의료를 이용하는 데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시장의 논리로 보면, 농촌 지역은 인구의 감소로 인해 적절한 규모의 병원이 성립되기 어렵다. 하지만, 자원의 균형적 배분과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국가는 일정한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농촌지역에 자원 공급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건강보험의 현황과 문제점
1)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
WHO가 발간한 2000년도 연차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국민의료비에서 사적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의료비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한국일 정도로 매우 높다.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사적 의료비 부담 비율은 OECD 국가의 평균치 27.4%보다 두 배 이상 되는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보건복지부가 OECD에 의뢰하여 실시한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보더라도, 높은 사적 의료비 부담비율은 첫째, 본인부담금 지불이 지불능력과 관련이 없고, 둘째, 본인부담금 면제 혹은 감면이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해당하는 의료수급권자에만 적용되며, 셋째, 고액진료비가 발생하여도 본인부담금 상한선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매우 소득 역진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본인부담금이 존재함으로 인해 의료이용의 재정적 장벽이 높아져 조기진단 및 조기치료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예방서비스와 같이 의학적 필요성은 높으나 소비자가 필요성을 덜 느끼는 서비스가 더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의료서비스는 상대적으로 소득 탄력적이기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이런 부작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가계는 불건강으로 인하여 쉽게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며, 빈곤과 불건강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과다한 본인부담 문제는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서 제외되어 있는 비급여 항목의 존재에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최근 비급여 항목이 공급자의 유발수요에 의하여 급속하게 팽창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비급여의 확대 자체가 정부 재정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국민의료비를 상승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향후 정부 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또한 불필요한 부분에 자원이 집중됨으로서 자원 배분에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비급여의 확대 자체가 직접적인 가계 부담으로 이어져 가정경제 파탄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건강보험은 총진료비의 50% 정도만 보장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보장성 수준으로 건강보험이 국민 건강의 안전망의 구실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직접적인 진료비 부담 뿐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휴업일수 또는 손실일수를 보장해주기 위한 상병수당이 없는 상황에서 의료서비스의 이용은 저소득계층에게 사치일 뿐이며, 건강보험의 혜택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2) 과잉진료를 유도하는 진료비지불제도
우리나라는 진료비지불제도로 수가 항목이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는 행위별수가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 의사는 자신의 수입을 최대화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치료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가능한 많은 환자를 유인하려는 동기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수가 항목이 이렇게 세분화되면 건강보험은 개개의 진료 행위를 일일이 심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과다한 행정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심사평가원과 의료기관 간에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다.
행위별수가제는 의사나 의료기관이 진료량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을 막기 어려운 보건의료시장의 특성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진료비지불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차의료에 적합한 방식인 인두제, 보험자와 의료제공자 간에 진료비를 사전에 계약하고 배분하는 방식인 총액계약제 등 다양한 진료비지불제도로 전환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3. ‘무상의료’의 과제
가. 의료이용에서 경제적 장벽의 제거
1) 건강보험의 적용 확대
원칙적으로 미용, 성형 등을 제외한 모든 비급여 항목의 급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비급여의 급여화가 이루어진다면 현행 본인부담금 상한제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고액진료비가 발생하는 고위험군 환자의 본인부담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비급여의 급여화가 선결 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비급여의 급여화가 이루어지면, 공적으로 조달되는 보험재정의 비율이 높아지게 되어 의료체계 전체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특히, 국민과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진료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게 되고, 의료서비스 이용에 있어서 사회계층간 불형평성을 개선하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2) 본인부담금제도의 단계적 폐지
그렇지만, 본인부담금제도가 남아 있는 한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이 해결되기 어렵고, 소액 진료비라 하더라도 의료이용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으며, 소득이 낮을수록 그러한 경향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본인부담금제도의 폐지를 단계적으로 달성해야 한다. 저소득계층을 포함하여 보건의료에서 취약한 집단인 영․유아, 임산부, 노인 등에 대한 본인부담금제도를 우선적으로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모든 계층으로 확대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3) 상병수당의 도입
진료비에 대한 직접적인 부담이 사라지게 되면, 서비스 이용 중에 발생하는 가계 소득의 상실을 보전해주는 상병수당을 신설해야 한다.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계 소득의 상실 문제는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저해하는 주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특히 저소득계층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상병수당의 신설이 필요하다.
나. 재원조달 기전의 공공적 개편 방안(건강보험을 중심으로)
1) 행위별수가제를 다른 진료비지불제도로 전환
행위별수가제의 대안으로 인두제, 총액계약제 등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총액계약제란 주어진 기간 동안 의료공급자에 의해 제공되는 진료서비스와 약품의 총비용을 사전에 미리 계약하여 지불하는 제도로서, 많은 국가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다.
2) “자본비용” 지원을 위한 재원의 신설
민간부문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민간병원이 자본 투자를 필요로 할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별도의 재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병상수급 조절기금」 등의 설치가 필요하다. 「병상수급 조절기금」은 민간중소병원의 요양병원 전환을 촉진하고, 민간병원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한 시설 투자에 사용될 수 있으며, 민간병원의 지역적 분포를 개선하는 데에 투자될 수 있다.3)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의료보험은 경상비용만 지불하고, 병원의 자본적 투자비용은 별도의 예산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지원을 받는 데에 민간 및 공공병원 간에 차이가 없다.
다. 보건의료 서비스제공체계의 공공적 개편 방안
1) 대안으로서 공공의료 확대
시장실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공공의료의 강화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성실한 공급자로서 공공병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런데, 공공의료가 대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지금의 공공병원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한다. 환자 진료 뿐 아니라 지역사회 보건의료사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역할과 기능이 강화되고, 수익성의 원리가 아닌 공공성의 원리에 의하여 운영되는 병원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제 조건으로서 민간병원에 뒤지지 않는 현대적인 시설과 우수한 인력, 그리고 운영의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2) 서비스공급체계의 개편
공공부문을 50% 이상 확충함과 동시에 의료비 낭비와 불평등한 건강문제를 낳은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서비스제공체계가 개편되어야 한다. 먼저, 1/2/3차 기능을 분화하고 전달체계를 확립하여야 하며, 의원은 외래 중심으로 병원은 입원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둘째, 시설, 인력 및 자원이 지역적으로 균형 있게 분포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과잉 공급되어 있는 급성병상을 장기병상으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넷째, 적정 서비스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급성기병원은 300병상 이상의 적정 규모를 갖도록 한다. 다섯째, 치료 위주의 서비스공급체계에서 예방과 보건관리가 중심이 되는 서비스공급체계로 전환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간 의료기관 역시 공공성이 강화되어 법 형식적인 비영리성이 아니라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비영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결.
최근 건강보험 흑자분인 1조3천억 원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논쟁이 형성되었지만, 운동 과정에서 건강보험의 취약한 보장성 문제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보장성 문제의 핵심이 비급여에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할 수 있었으며, 정부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운동의 실천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급여의 급여화 문제, 그 중에서도 3대 핵심 비급여인 병실료차액, 선택진료료, 식대 등에 대하여 쟁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무엇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상의료의 접근 방식을 소득계층별로 가져갈 것인가, 연령집단별로 가져갈 것인가, 질병별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현재 비급여 부분을 급여 범위에 완전하게 포함시키지 않고서 건강보험 보장성의 구조적 취약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민간의료보험과 영리법인의 물적 기반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급여의 급여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실제 건강보험공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비급여가 전제 진료비의 21.5%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제외하고 보장성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현재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은 왜 암부터인가에 대한 논리적 정합성 측면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안고 있다. 그렇지만 ‘암부터 무상의료’를 주장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암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파장에 주목하여 건강보험 흑자분인 1조3천억 원에 대한 사용처로서 제시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왜 암이냐는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는 대응이 아니라 암‘부터’에 초점을 맞추고 비급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대응이 필요하였고, 전반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운동이 합리적 정책 내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질 경우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국민과 함께 나가기 어렵다는 점에서 ‘암부터 무상의료’운동의 성과를 전반적인 무상의료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적 매개가 바로 ‘비급여의 급여화’, ‘모든 의료비의 건강보험 적용’ 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3대 핵심 급여가 핵심적인 문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각년도
2) 김용익. 공공성 부여를 통한 중소병원 육성지원 연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2003.
3) 김용익. 보건의료공급체계와 보건의료자원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발표자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