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클린 뒤프레라는 첼로 연주자의 죽음
“노무사님도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가 봐요.” 얼마 전 한 목사님이 법률원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클린 뒤프레라고 하는 한 첼로연주자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저요. 그냥 조사하다가 알았어요.” 사실 몇 달 전 클래식 관련 서적을 읽다가 아무 생각없이 지나쳐 버린, 한 열정적인 예술가의 죽음을 부른 불치병과 같은 병명으로 소송을 담당하게 될 줄이야 …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한 전도사님이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젊은 여교사를 만났고, 그녀의 처지가 너무 딱해 전교조에 아는 분에게 “공무상요양불승인처분소송”을 권하여 주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했던 젊은 여선생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전교조에서 법률원에 소송을 의뢰한 것이다.
사전조사차 그 여선생님을 지난해 늦가을에 광주에 있는 병원에서 만났다. 걷지도 못하고 점점 머리는 퇴화되어 가고, 신경과 근육이 굳어져가는 불치병에 걸린 젊은 여선생. 삶에 체념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처음 만난 나에게도 짜증을 내는 그 선생을 만났을 때 소송에 대한 걱정보다 세상에는 저런 불치병도 있구나. 저렇게 순진한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는 너무 순진했어요..” 어느덧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시키는 대로 다하고 애들 가르치느라 정신없었어요. 그리고 여름방학 때도 고3 국어 선생님을 대신해서 보충 수업했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일주일 내내 아이들 가르치고 밤에 야간자습 지도하고 얘들 다 보내고 문 잠그고 학교 나왔어요. 시골이라 너무 무서웠어요” 그리고 그녀는 심사청구서상에 잠시 언급된 지네 이야기도 했다. “하수관이 터진 이후로 관사 주변에 물이 자주 샜어요. 그리고 지네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손바닥 크기만한, 15cm도 넘을 거예요. 개학하고 정신없을 때 새벽에 지네가 목을 타고 몸을 넘어갔어요. 그 때 너무 놀라 잠을 깨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그녀는 왼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시골이라 치료받을 수도 없고, 읍 전체에 안과라곤 없었다. 주말이 되어 광주로 나와서 안과에 찾아가니, 시신경염이라 했고 의사는 특별히 과로와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속되는 야간근무 및 오전 오후 특별수업, 각종 행정업무처리, 연수업무준비, 출장업무 등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왼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 내에서 가장 많은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장학지도 수업을 준비하느라 며칠을 밤늦게까지 준비를 했고, 국어와 관련된 각종 외부대회 참가를 위해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야간근무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관사생활의 불안감은 지속되었다. 2003년 11월 22일 오전, 수업 준비 중 갑자기 쓰러진 이후 광주소재 병원을 거친 이후 전남대병원에서 아급성 상태의 뇌염 진단, 서울대병원에서는 헤르페스바이러스뇌염(Herpes Simplex Encephalitis)진단, 그리고 그 이후 가천의대 길병원에서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어려운 사건이었다. 지금도 초짜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산재를 깊게 공부해 번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민주노총 지구협에서 노조지원에 익숙한 나에게는 산재는 아직도 두려운 벽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다만, 열정과 애정은 누구 못지않게 있다. 나의 아버지가 탄광에서 산재로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우리가족은 아버지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희귀병일수록 사전조사가 중요하다
가끔 노동조합 파업을 지원했을 때 조합원이나 간부에게 “전쟁”을 파업에 비유하며 조언하고 교육했다. 그만큼 이기기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 또한 마찬가지다. 적(피고)와 나(원고)와의 대립적 관계의 취소소송의 경우에는 오직 勝, 敗만이 존재하는 냉혹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시작은 “계획의 수립” 즉, 손자병법 제1편에서도 언급되는 소위 “始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병렬적 계획 수립이 아닌 입체적 소송계획의 수립과 진행, 점검과 분석은 필수적이다. 일단, 기존판례를 수집하는 것과 당해 사건의 소송기록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특히 요즘과 같은 희귀병이나 어려운 상병이 많을수록 사전조사는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기록과 사건을 검토해보니 다발성경화증에 대한 판례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대법원(대법원 2002. 9. 24. 선고 2001두5934판결). 또 하나는 최근 행정법원(서울행정법원 2004. 6. 29. 선고 2003구합13694판결)에서 승소한 사례가 있다. 담당 변호사가 누구인지 파악해서 두 곳을 직접 방문해서 어렵사리 모든 소송기록을 복사할 수 있었다.
당해 사건의 핵심은 역시 과로, 스트레스와 인체의 면역체계와의 상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법원에서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하여 면역능력이 저하되어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한 경우 그 질병에의 감염 경로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업무와 상병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사례가 있다. 즉, 소위 “패혈증 사건” (대법원 1992. 7. 24. 선고 92누5355 판결)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고, “헤르페스바이러스뇌염”에 대해서도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기능이 약화되어 상병일 발생하였음을 인정한 사례(서울고등법원 1998. 11. 19. 선고 98누3510 판결 등)가 다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바이러스 뇌염에 대해서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1995. 4. 7. 선고 95누399 판결 등)
그리고 의학적 상병에 대한 자료조사에 들어갔다.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알고 있는 노조 사무장이자 간호사를 통해서 서적조사를 부탁하는 한편, 논문조사는 관련 사이트를 뒤져가며 확보해두었다. 또한, 사실조사를 위해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에 대한 면담조사 1차례, 이후 질문답변조사를 2~3차례 하였다. 그 교사가 참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동료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느꼈다. 특히 유족사건의 경우 직장동료를 만나보면 평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부족한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동시에 각종 증거자료확보에 들어갔다. 직접 법원을 통해 선생님이 근무했던 학교에 송부촉탁을 할 수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하는 송부촉탁은 추후에 보다 명확히 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현재는 사실조회 및 송부촉탁을 준비 중에 있다.
일반인들이 보는 눈은 정확하다
이후, 기존자료 및 데이타의 수집 분석이 끝나고 서면작성 작업을 시작하였다. 산재소송(행정소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 서면의 내용 및 증조조사에 대한 전술채택이다. 즉, 집중심리제로 인한 준비기일 이전에 업무상 재해(공무상 질병)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필수적이며, 근로복지공단 소송수행자들이 보는 송무세미나 자료집에서도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각종 촉탁신청의 적절성이다. 사실조회, 문서송부, 감정촉탁, 증인신청 등을 시기적, 내용적으로 적절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준비서면을 몇 번이나 수정해가면서 정성을 다해 글을 작성하고 사무실 시보뿐만 아니라 수습노무사, 변호사들에게 한번 읽어보게 한 후 서면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 보는 눈은 정확하다.
예전에 가끔 아내에게도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서면을 읽게 하고 조언을 들었다. 준비서면 34페이지, 증거자료 갑제29호증(분량 300page), 참고자료로 논문6개․판례10개를 첨부하고 1차 서면을 제출하였다.
감정촉탁신청은 법원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서울대병원에 하였고, 기존 사례의 촉탁신청과 논문을 철저히 분석하고 상병에 대해 보가 깊이 연구한 뒤 다발성경화증과 자가면역질환과의 상관관계 등을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고 감정촉탁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증인신청은 가장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2명의 선생님들을 채택하였다. 어제 감정촉탁은 회신이 도착하여 읽어보니 기대하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회신되었다. 의학적 견해가 갈수록 중요한 판단근거가 되는 산재소송에 있어 감정의 중요성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소송은 반 정도 진행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2명의 증인신문뿐만 아니라 당사자 본인신문을 신청해서 현재에도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재판정으로 불러낼 생각이다. 중추신경질환으로 일반적으로 불치병으로 알려있는 다발성경화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판사에게 알려 주고 싶다. 이제 소송은 반 정도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맡고 있는 수십건의 산재사건 중에서도 이 사건은 특히 애착이 간다. 젊은 날 사범대를 졸업하고 희망으로 시작했던 시골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삶이 다시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도 들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다시 교단에 복귀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저요, 올해의 선생님에 선정됐어요” 처음 만났을 때, 2004년 학생들이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뽑혔다고 자랑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한 때, 자클린 뒤프레의 연주곡을 사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지금껏 망설이고 있다. 최근 그녀는 상태가 악화되어 호흡기에 의존해서 병실에 누워있다.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고 다시금 교단에 설 수 있을 때, 그녀에게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 E단조 op.85 CD를 사주고 싶다. 첼로의 강한 심연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연주곡이 담긴.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