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동자감시 – 변해온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노동자 감시” 또는 “작업장 감시”라는 말이 주는 계급분리의 의미는 얼마나 대단한가?
이러한 용어는 감시의 객체(노동자)는 물론 감시의 주체(사용자 또는 자본가)마저도 비인격적 존재로 전환시켜버린다. 감시의 객체인 노동자는 관리되어야 할 생산라인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반면 감시의 주체인 사용자는 노동자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로 격상한다.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자본가의 모니터링 범위 안에서 항상 존재하고 그리하여 자본가는 노동자의 일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정보를 확보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자본가가 지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노동자를 들여다보는지 알 수조차 없다. 여기서 정보는 계급 간 위계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자본으로 변신한다. 자본가는 ‘정보자본’을 확보하게 되고 이 ‘정보자본’을 이용하여 또 다른 이윤확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대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가에게 제공한 ‘정보자본’에 종속되어 한 치도 자신의 계급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감시는 일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하여 발달되고 확장된 감시의 기법은 그대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그것으로 전환한다. 또는 자본의 발달된 감시의 기법이 이제는 국가의 감시시스템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제공되기조차 한다. 감시의 기법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졌으며, 감시의 범위도 더욱 넓어진다. 과거의 감시는 폭력적 방법을 통해 노동자로 하여금 상시 감시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감시는 오래된 피비린내를 감추는 대신 노동자로 하여금 무의식 속에서 자발적으로 감시를 수용하도록 세련되게 변했다.
과거의 감시가 대면적 상황을 통해 감시의 주체를 감시의 객체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감시는 감시의 주체와 객체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생산성 향상과 이윤극대화의 방법 속에서 이용되는 노동자 감시행위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안전과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강요된다.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노동자 감시의 방법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노동자 감시의 목적과 결과는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감시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력 역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래 지금까지 전혀 그 강도의 변화가 요청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 감시형태의 변화과정
1) 최초의 노동자 감시 – 폭력과 규율
엥겔스가 묘사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출퇴근 하는 것이 아니라 빵 한 덩어리를 위해 감옥과 같은 수용 시설 안으로 자신의 인격을 감금한다. 매우 정교하게 규정되어 있는 노동자에 대한 벌칙들이 존재한다. 분단위로 작업장의 입출을 확인하고 공장가동과 무관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벌금을 부과한다.
예를 들어 작업시간 중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 6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또 다른 공장규칙을 보면 3분 늦게 온 노동자는 15분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고 20분 늦게 온 노동자는 하루 일당의 1/4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아침식사 시간까지 공장에 오지 않은 노동자는 월요일의 경우 1실링, 다른 날에는 6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처럼 기계적인 벌칙의 적용을 위해서는 결국 노동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9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러한 전제적 규율 하에서 생활해야 한다.”
생산현장의 노동통제는 철두철미한 감시구조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초기 노동자 감시는 말 그대로 폭력을 수반한 것이었다. 족쇄를 채운 아이들의 모습은 흔한 것이었으며, 군대 혹은 감옥에서의 규율이 노동 현장을 지배한다. 이 시기의 노동자 감시는 ‘작업장 감독’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인다. 감독을 하는 자(주로 중간 관리자)는 작업 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살펴본다. 노동자가 몇 분이나 늦게 출근을 했는지, 작업 중에 자리를 비웠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한다. 그리고 기록된 결과에 따라 벌금을 부여하거나 쫓아낸다. 때론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지기도 한다. 맑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병영적 규율”은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이 되었으며, 이러한 규율은 아예 “감독 노동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누군지, 자신이 어떻게 감시당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작업장을 감시 또는 감독하는 자의 눈은 오직 두 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가들이 이미 알고 있다. 한 작업장에 두 개 이상의 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본가들은 중간관리자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한다. 평상시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게 되지만 때로 감시의 결과를 이용해 집단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노동자들은 감시 자체를 공포로 여기게 되며 그 감시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 감시행위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피부로 절감하기도 한다. 최초의 노동자 감시는 이렇게 규율과 폭력으로 점철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기제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컨베이어벨트의 도입 – 일괄적 노동자 감시의 발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일괄생산 공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감시에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중간관리자에게 노동자 감시의 모든 것을 맡겨놓지 않는다. 더불어 이 시기부터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행위는 생산 공정의 관리와 동일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따로 폭력을 수반할 필요 없이 공장 문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5번열 3번째 작업자, 나사를 더 조일 것!” 톱니바퀴 속에서 헤매는 불쌍한 찰리 채플린은 감시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괄생산공정 속의 노동자들 바로 그들의 모습이다.
컨베이어벨트는 매우 유용하게 감시도구의 역할을 한다. 정해진 양의 생산품이 컨베이어벨트의 종착지를 통과하지 못하는 순간 그 작업라인의 누군가 혹은 전부가 생산을 위한 작업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그 이유가 컨베이어벨트의 기계적 결함이 원인이던 한 순간 작업자가 자리를 비운 것이 원인이던 결과는 마찬가지다. 기계적 결함을 해소하는 것 역시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관리자 또는 자본가는 어떤 이유에서건 노동자들에게 귀책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시기 자본은 매우 유용한 방식으로 그들의 감시행위를 은폐할 수 있게 된다. 즉,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형태의 노동자 감시가 가능해지면서 폭력적인 감시행위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체감의 공포를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는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작업현장에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자동화가 공장에 도입된 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된다.

3) 전자적 기술의 발달 – 동시에 감시기술의 발달
기술의 발달은 생산성의 혁명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은,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 수공업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품을 생산해냈으며 이윤의 획기적 증대를 가져왔다. 동시에 무자비한 자원소모를 요구하는 이 ‘혁명’은 감시를 당하는 쪽에 노동자를 배치하고 감시를 하는 쪽에 자본가를 배치하는 계급 간 위치구분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위치의 구분은 소위 첨단기술의 등장과 더불어 더욱 강화된다.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감시행위는 이제 단순히 작업 라인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은 공장 안에 전화가 설치되는 즉시 전화를 도청하기 시작했다. 통신라인을 타고 흐르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자본의 귀에 즉시 전달된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자본의 관리대상종목에 포함되었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정보를 축적하고 이용하는지를 확인한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통신망 자체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자본은 언제든지 웹사이트 접속현황을 확인하고 이메일 사서함을 열어볼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메신저의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작업장 안팎으로 설치된 CCTV는 노동자들의 현재 행동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 감시를 위한 기술의 도입은 전혀 다른 목적의 기술도입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이전까지의 감시는 노동자들 개개인의 행동현황을 모니터링할 목적임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본 역시 그러한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이를 통한 자본과의 적대적 관계설정이 감시행위에 대한 노골적 저항의 형태로 발현하는 것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감시행위를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본은 노동자 감시의 본래 목적은 달성하되 자신이 감시자의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줄 명분과 포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시기술은 감시의 목적이 아닌 편리와 안전과 효율, 보안의 목적으로 위장되어 현장에 도입된다. 전화와 컴퓨터 등을 이용한 통신의 감시는 영업의 기밀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다. 작업장의 CCTV는 사건사고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작업자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생산성의 향상 및 이윤의 증대를 위한 경영기법으로 둔갑한다. 안전과 효율, 보안이라는 목적은 그 자체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공통이익을 위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통신망에 대한 일정한 감시와 CCTV 설치 등은 노동자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해당 기술들이 분명 노동자 감시에 활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정한 수용을 감내하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감시기술을 매개로 하는 적대적 긴장감은 희석된다.

4) 최첨단 경영기법의 도입 – 최첨단 감시의 현실화
오늘날 첨단경영기법이 작업장에 도입된다는 것은 첨단 수준의 감시기술이 도입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고도의 정밀한 기술을 이용하여 진행되는 노동자 감시행위는 아예 노동자들을 자발적으로 감시구조 내에 편입하도록 만들기조차 한다. 소위 ‘전자정보적 감시 · 통제’는 파놉티콘의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하며 “지배자 없는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푸코가 “훈육(discipline)”이라고 명명했던 “직접적인 지배와 명령이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활동할 수 있는 자기-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첨단기술이 노동자들의 인식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첨단기술에 의해 감시되는 존재인 노동자들이 오히려 그 기술로 인해 자신들이 수혜를 보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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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기법으로 도색된 첨단 기술은 온갖 감시의 기법들을 하나의 매트릭스 안에서 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의 경우, 물류 · 생산 · 자원 · 인사 · 계약 등 모든 경영요소들은 하나의 전산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기업경영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활동은 일체 수치로 환산될 수 있으며, 수치로 확인되는 노동자들의 행동결과는 임금이나 인사에 반영될 수 있다. 이때, 전화에 대한 감청자료, 통신망 감시결과, CCTV에 찍힌 노동자들의 모습, IC 카드 또는 액티브 배지에 의해 기록된 출퇴근 정보 및 이동경로 정보, RFID나 위치추적장치의 기록, 키보드 속도 등은 단일한 전산화과정을 거쳐 ERP 프로그램으로 처리된다. 여기엔 스마트카드 기능을 가진 사원카드의 거래내역, 금융업무 등의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노동자 한 개인의 역사가 조선왕조실록보다도 훨씬 자세하게 기록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기법은 종종 생산성 향상과 추가이윤획득이라는 소기의 목적물을 달성하게 된다. 신경영기법의 도입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안전사고의 방지나 절도사건의 방지 또는 해결이라는 성과물마저 만들어낼 때가 있다. 이 부분은 실제 ‘소 뒷걸음질치다가 개구리 밟은 격’에 불과하나 오히려 원래 목적보다도 더 유용하게 신경영기법의 선전에 동원된다. 그리하여 신경영기법은 사실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프로파간다가 가능해지고 이 상징조작에 의해 노동자들은 무기력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신경영기법을 수용한다.

3. 필연적인 위계질서의 형성 – 사장실에는 CCTV가 없다

기술발전의 형태에 따라 분절적으로 감시의 유형을 분류하였지만 사실 감시의 유형은 앞서의 분류처럼 획일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시의 방법은 앞 시대의 기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에 더하여 새로운 감시기법을 보완하는 형태로 발전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간관리자가 직접 작업현장을 관리 감독하고 노동자들을 감시 통제하는 현상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라는 공분의 대상은 사라졌지만 최초의 노동자 감시형태가 가지고 있었던 대면관계의 위압감은 상존하는 것이다. 병영과 유사한 규율상태 역시 바뀐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보다 세련된 관료화의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여기에 컨베이어벨트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일괄감시의 기법이 더해진다. 중간관리자는 더 이상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현황을 점검하는 것이 감시효율을 증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컨베이어벨트의 최종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해당 라인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전자적 기술발달의 결과 도입되는 각종 첨단 시스템은 중간관리자의 위치를 작업장이 아닌 중앙 통제실로 옮기도록 해주었다. 감시와 통제는 중앙통제실 한 편에서 모니터를 오가는 각종 수치로 가능해진다. 노동자 개인, 또는 생산 라인에 대한 개별적 감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기가 정밀해진만큼 감시 역시 정밀해진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 간의 긴장이 높아지면 감시의 강도 역시 더욱 강력해진다. 발달된 기술은 자본이라는 후견인을 등에 업고 노동자가 움직이는 전 영역에서 자신의 기술을 펼쳐 보인다. 출퇴근카드는 펀치카드에서 스마트카드 또는 RF 칩을 이용한 액티브 배지로 바뀌고, 노조사무실 앞과 관리대상 노동자들이 있는 라인에는 CCTV가 밀집된다. 이동경로는 수시로 확인되며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인터넷과 이메일과 전화와 팩스는 무방비 상태에서 관리자들 앞에 알몸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 덕분에 자본은 더 이상 감정적인 언사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이치를 따져가며 사고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린터에서 출력된 엑셀파일을 복사하여 나눠주면서 노동자들의 저하된 능력을 소수점 아래까지 확인할 수 있는 수치로 제시한다. 그들은 온화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후, 그래프와 표와 수치라면 환영해 마지않는 기자들에게 배포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원천적인 한계로 인해 자본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원천적인 한계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장실에는 노동자가 설치한 CCTV가 없다. ERP는 사장의 전유물일 뿐 노동자들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기업주와 중간관리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질타를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도덕불감증을 수치로 환산할 수가 없다.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빅 브라더가 윈스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도 이제 자본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야만 하는가?

4. 승객의 안전 또는 ‘양심수당‘

오시이 마모루였던가? “전쟁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면 전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보병이 정글을 달리다가 총에 맞아 전사하는 장면을 본 미국국민들은 대대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한다. 그것이 베트남전의 양상이었다. 그러나 오밤중에 불꽃놀이 하듯 바그다드를 ‘정밀폭격’하는 장면을 본 미국인들은 마치 비디오 게임을 즐기듯 뉴스를 기다린다. 피의 살육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TV 모니터의 비주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전형적인 상징조작.
자본은 이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노동자 감시’라는 매우 식상한 경영의 방법에서 ‘감시’라는 단어를 탈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편리 · 안전 · 효율”이라는 단어들이 작업장 안에 설치되는 각종 감시시스템의 목적으로 포장되는 것은 그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조작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버스 정면의 룸미러 뒤편에 설치된 CCTV는 난폭운전이나 ‘삥땅’ 등 운전기사의 업무상태에 대한 확인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승객의 안전 또는 각종 사건사고 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할 한다. 전자는 원래의 설치목적, 후자는 어쩌다 생기는 부산물. 그러나 부산물은 큰 뉴스로 나오지만 전자는 ‘양심수당’이라는 노자간의 어정쩡한 합의를 통해 논란을 피해간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우군이 되어야할 대중은 오히려 노동자들보다는 자본의 입장에 동조한다. 버스 안에 설치되는 CCTV에 대해 반발하는 기사들을 향해 대중은 기사들의 양심을 의심한다. 자본가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감시와 통제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아예 알지 못한다. 대중이 우매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언론의 보도 어디에도 그 CCTV가 상시적인 감시를 통해 버스기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다.
시스템 안에 갇힌 노동자들의 현실은 암울하다. 그들은 결국 그 감시의 통제망 안에서 순응하던지 아니면 톱니바퀴에 끼여 허우적거리다가 미쳐버리는 찰리 채플린이 되던지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렇게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감시의 본질적 폭력성과 비인간성은 하나하나 폭로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이 감시를 강화하면 할수록 그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두려움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설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