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나라에 산재보험이 도입된 지 올해 들어 41년째이다. 그간 급여의 수준이 증가하고, 적용대상 역시 대폭 확대되는 등 산재보험의 외형은 다른 사회보장에 비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산재노동자들이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다. 산재신청을 통해 직업병 승인을 받기가 여전히 힘들고 재활이나 작업복귀와 관련된 제대로 된 요양 역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산재보험을 개혁해 보고자 하는 노동보건운동진영의 대안 제시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제도의 개선과 산재노동자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가 바라는 산재보상제도는 간단하다. 아프면 간단한 절차에 의해 누구나 좋은 시스템에서 열심히 치료받고, 건강한 몸으로 가능한 조기에 건강한(위험요인이 사라진) 작업장에 복귀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산재보험의 개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대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만들어진 대안의 지향이 무엇이며, 누가 제도의 주도권을 쥐고 가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제도를 개선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평가하거나,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도론적 접근”이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라고 제시한 내용이 현장의 노동자에게 또 다른 억압적 구조를 가지고 있거나, 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못하거나,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사안을 미뤄 두는 등의 현장의 노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이는 현장 노동자들에 의한 문제제기와 투쟁을 통해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제도적 개선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하이텍 투쟁에서 볼 수 있듯, 제도개선은 전문가들의 심포지엄이나 외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해서 내오는 것 이상으로 현실의 긴장을 통해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그렇게 모아진 제도개선과 요구는 꼬여 있는 문제의 숨통을 트이게 할 것이다. 다른 어떠한 제도개선도 핵심적인 내용을 건드리지 못했기에 다시 새로운 문제로 계속되는 우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로부터 시작해 보자.

1. 간단한 절차에 관한 이야기

(1) 산재승인되기 전에 마음고생!, 몸도 고생!

치료가 필요한 질병의 발생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업무상질병(직업병)의 경우 한두 달은 기본이고, 3개월, 6개월 심지어 1년을 넘기는 경우도 많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는 우선 사업주날인을 받아야 한다. 명확한 산재임에도 이를 사업주가 그렇다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산재를 줄이고자 하는 사업주의 회유와 협박이 한차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산재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고용에 대한 위협 앞에 아픈 몸은 뒷전이 되고 만다. 치료받기 위한 회사 측의 공상처리가 있지만, 결국 법을 어겨가며 불완전한 치료와 땜질식 처방에 자기 몸을 내 맡겨야 한다. 이를 이겨내고 산재신청을 하고 나서도 준비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다. 산재당한 몸을 이끌고 서류들에 도장 찍어 가며 돌아다녀야 하고, 아니면 가족 중 누군가는 여기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치료는 뒷전이 되고 높은 자기부담비용으로 인해, 치료에 주저하게 되어 질병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다. 산재승인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높은 고가의 검사를 해야만 한다. 산재승인의 높은 장벽은 보다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검사를 하도록 강요당하며, 이러한 비싼 검사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객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판단이 보류되거나 불승인이 된다. 치료의 방향에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 비싼 검사들을 수행하는 것은 산재노동자 본인에게 더 큰 부담을 부여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요추부염좌, 요추부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병이 있다. 이 병은 흔한 직업성 근골격계질환이다. 이중 수술을 해야 하는 상태는 1%미만이다. 대부분 이 병을 앓고 있는 산재노동자는 물리치료, 약물치료 등의 증상완화치료와, 운동치료와 근육강화 운동을 통해 치료 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 비싼 MRI를 찍어야만 한다. 높은 산재승인의 벽은 불필요한 검사를 양산한다.

(2) 절차를 간단히 하기 위한 개선안

민주노동당의 입법예고 내용을 보면 “ 자신의 재해가 업무상 재해 여부를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를 진료한 의사 등에게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근로자의 상병이 업무상 재해인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절차를 신설함” “의사 등이 노동자의 상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경우 심사평가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도 요양(치료)은 먼저 보장되도록 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산재미인식 노동자에 대해 폭넓은 적용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발의된 의미 있는 제안이다. 또한 분류기준표라는 간단한 절차와 주치의의 직접 판단에 의해 승인과 치료가 이루어진다면 산재노동자에게는 고통의 반쯤은 덜 정도의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주치의가 직접 직업병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우선적인 치료보장을 해주는 것 역시 이미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런 절차에 의해 산재요양이 이루어진다면, 사업주 날인을 꼭 받아야 하는 제도는 폐지될 것이고, 이것은 가장 큰 장벽의 제거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변화가 산재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 줄 것인지는 의문이다. 우선 주치의가 직업병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재해성질환의 경우는 가능하겠지만(현재에도 재해성질환의 경우, 승인 전이라도 치료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직업병의 경우는 주치의가 직업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이를 보완하기위해 표준화된 「산업재해분류기준표」를 만든다고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질병에 대해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분류기준표를 작성하는 것이 쉽지 않고, 인과관계를 단순화하기 어려운 질병도 많다. 재해성 질환의 경우는 관련성을 평가하는데 문제가 없으며, 재해성질환에서 조차 산재임을 알지 못해 급여를 받지 못했다면, 위 제도의 실행과 함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대부분의 직업성질환의 경우 개정안에서 예를 든 수근관증후군처럼 명백하고 단순화하여 제시하기 어렵다. 또한 의사들의 적극성이 유도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현재 의사들의 진료행태가 매우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상태에서 직업병인지 여부를 밝히기 위한 적극적인 진료행위를 할지는 미지수이다. 개정안이 실제 선보상의 의미를 갖는 부분은 관련성이 명확히 알려진 일부 재해성질환에 국한될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위와 같은 기준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만들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되며 그 내용 역시 자본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도록 막아야 함은 물론, 현장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잘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현재 제도 아래에서 위와 같은 절차의 개선에는 직업병승인기준의 완화 문제로 귀결된다. 직업병 인정기준의 장벽이 높다면, 이를 감수하며 선보상을 해줄 병원은 없으며, 설사 선보상을 해준다 한들, 직업병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후 부담은 다시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3) 절차의 문제는 결국 직업병 승인기준의 완화, 건강보험의 보장성 문제

직업병인정기준이 현재처럼 쉽지 않은 높은 장벽이라면, 이들 직업병에 대해 선보상을 해주는 시스템을 만든다 하더라도, 이를 수행하는데 여전히 높은 장벽이 남게 된다. 의사는 직업병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 본인부담을 요구할 것이고, 직업병으로 승인되기까지 건강보험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건강보험의 높은 본인부담률은 산재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치료를 방해 할 개연성이 크다. 선보상이 의미 있는 개선안이 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직업병 인정기준의 대폭 완화를 통해 적극적인 치료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여, 설사 직업병 인정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건강보험을 통한 보장과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치료를 하는 병원이나 산재노동자 모두 치료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직업병인지의 여부를 평가하는 작업이 질병의 예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가 주된 개선의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직업병 여부를 밝히는 노력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과 연결되는 과정이어야 하고, 이러한 과정과는 별도로 산재노동자들의 결과주의에 입각한 신속하고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이텍 노동자들은 그들의 정신질환이 직업병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직업병을 유발한 원인을 제거하고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환자이다. 그들은 직업병 승인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실제 이것이 가능한 제도여야하고, 이를 위한 전제조건들을 요구하는 개선안이 되어야 한다.

2. 좋은 요양시스템에 관한 이야기

(1) 제대로 치료받고, 빨리 복귀하고 싶다!

산재노동자는 아픈 몸이 빨리 치료되고, 건강한 몸으로 빨리 일터에 돌아가기 원한다. 길고 긴 요양기간을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몸이 낫기를 바란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못하는 현재의 요양제도는 요양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산재노동자의 적이다. 잘못된 요양제도로 불필요한 치료를 받으며, 장기간 요양을 하는 현행 요양제도의 최대 피해자는 산재노동자다. 운동치료, 물리치료, 체력증진, 심리상담 등 포괄적 치료를 제공해 주는 요양제도가 현재는 없다. 제대로 된 치료 없이 산재노동자를 도덕적 해이로 몰고 있는 이데올로기 공세만 난무하다. 의료상업주의에 젖어 산재노동자에게 온갖 불필요한 치료를 자행하는 의료공급자의 도덕적 해이는 뒷전이다. 요양기관을 관리하고, 이들의 올바른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명확히 직업병을 갖고 있는 산재노동자에게도 불필요한 절차와 행정업무로 요양의 지연을 일삼는 것을 자신의 최대 업무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보험자의 도덕적해이 역시 더 큰 문제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요양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산재노동자는 빨리 건강한 몸으로 자신의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2) 열심히 치료받기에 관한 이야기(열심히 치료하지 않는 노동자 이야기)

산재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논쟁이 올 한해 신문지상을 연일 매웠었다. 어떤 산재환자는 산재요양기간 동안 다른 직장을 다니다 고발당했고, 어떤 산재환자는 미리 사보험을 왕창 들어두어 산재 승인 후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의사와 짜고 진단서를 조작하고, 자동차사고 환자들처럼, 입원해 있어야 할 산재환자가 병원에 없다는 사실도 종종 보도된다. 실제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도 분명 있다. 그건 사기고, 범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산재노동자 전체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산재노동자에게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치료는 산재노동자의 치료기간을 늘리고, 직장복귀를 어렵게 하고, 질병으로부터 호전도 더디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요양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 역시 산재 노동자인 것이다.

(3) 제대로 된 요양의 내용을 제안해야 한다.

특히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포괄적인 치료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간단한 물리치료만 수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깨가 아파서 산재요양을 하는데, 수술하는 것도 아닌데, 2달씩 입원을 시킨다. 두 다리가 멀쩡해서 걸어 다닐 수 있고, 하루 종일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입원을 시킨다. 산재환자의 입원을 통해 병원수익을 유지하는 수많은 상업적 의료기관이 난무하고 있다. 산재노동자들은 의사의 말을 믿고 장기간 입원을 하고, 매일 같이 물리치료를 하지만, 그 병이 나을 리 만무하다. 의사는 산재노동자가 어떤 일을, 어떤 사업장에서 일을 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산재환자에 대한 요양의 질을 높이고, 요양의 내용을 관리 감독하여야 한다.

3. 작업복귀에 관한 이야기

(1) 오늘로 치료종결, 내일부터 12시간 잔업, 특근!!!

산재노동자에게 재활과 복귀를 위한 프로그램은 없다. 요양과정에서 약해진 몸을 이끌고 하나도 바뀌지 않은 작업환경으로 과거와 동일한 노동을 하러 이른 아침 두려운 마음으로 출근해야 한다. 약해진 몸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자신을 주시하는 눈초리가 느껴져 부지런을 떨어보지만, 돌아오는 건 재발과 부상뿐이다. 이런 산재노동자를 바라보며, 관리자는 “도대체 요양기간동안 뭘 치료했어?”라며 구박이다. 이런 현실이 두려워 복귀하기 싫었는데… 재활의 과정에서 과거의 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산재 전의 체력을 만들어서 작업복귀가 이루어져야 한다. 작업복귀는 심리적 지지 프로그램, 직장동료와 잘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순차적으로 작업시간을 늘려갈 수 있어야 하고, 이를 급여에 포함시켜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

(2) 작업복귀를 위한 개선안
민노당은 “재해 노동자의 원활한 직장및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 재활급여를 신설”을 제안하였다. 재활급여를 신설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의료재활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의료재활의 내용에 원직장 복귀를 전제로 한 심리적 재활 혹은 치료, 신체적 재활, 치료적 작업복귀와 같은 구체적 급여내용이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재활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안이 없다. 구체적인 내용을 마련하는 것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의료재활을 포함하여 구체적인 재활의 내용을 마련하고 이를 제안해야 한다.

(3) 건강한 작업복귀 프로그램 제안

그동안 집단요양투쟁을 벌여왔던 몇몇 사업장의 노동조합에서는 이제 건강한 작업복귀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이미 산재보험의 틀 내에서 보장되었어야 할 내용이고, 다른 여러 국가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내용임에도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이런 사업장들은 이를 수행할만한 노동조합의 힘이 있고, 대기업들이다. 중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자체적인 프로그램의 마련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당연히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의료기관이 제대로 된 치료를 하도록 관리감독하고, 건강한 작업장 복귀프로그램으로 산재노동자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면 보험자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 볼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려 할 것이다. 이제 누구를 위한 복귀프로그램이냐가 보다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맺으며

노동보건운동 제 단체들이 모여 산재보험제도 개혁 공대위(이하 ‘공대위’)를 만든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공대위는 산재보험과 근로복지공단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현장 활동에 밀접하게 결합하지 못한 채 해소되었다. 그 이후 2002~3년의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요양투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자본의 역공이 전면화되기 시작한 2004년이 되자 다시 한번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그리고 노동보건 제 단체들이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기준 폐기와 산재보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투위'(이하 ‘공투위’)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공대위부터 공투위에 이르는 몇 년 간의 공동 활동 속에서도 산재보험 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노동보건운동 진영 안의 서로 다른 입장들이 좁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었지만, 매 시기 정세와 당면 실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산재보험 제도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제도개혁 요구의 우선순위와 전술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현장의 구체적인 고통을 함께 확인하고, 이를 ‘우리’의 요구로 조직해내는 사안별․지역별 연대와 공동 실천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보건운동 진영은 연대와 공동실천을 통해 현장의 고통과 요구를 확인하고 나누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여러 입장 차이는 물론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놓고 대중의 요구를 모으고 조직해야 한다는 과제조차 “당을 중심으로 한 입법추진”이라는 방식에 의해 일순간에 압도된 듯 하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과 노동조합 상급단체 담당자, 그리고 진보적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개정안을 만들어냈고, 그 나머지는 – 노동보건운동단체이건 현장 노동자이건 – 그 내용을 받아보는 입장, 선전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요구와 참여를 조직하지 못하고 상층과 전문가에 국한되어 일을 추진해온 과정상의 한계는 분명하다. 개정안이 나온 지 몇 달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투쟁의 현장에서는 ‘산재보험 개혁하라’는 추상적 구호 이상의 구체적인 개정안 내용이 요구로 외쳐지지 않는다. 최근 ‘누구나 쉽게 치료받게 하라’와 ‘제대로 치료하라’는 주장으로 조금은 구체화되고 있지만, 아직 대중적인 요구로 자리 잡았다고 하기에는 이르다.
그렇다면 이 개정 법안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번 시도를 현장 실천과 투쟁의 성과로 자리매김하려면 우리는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노동재해와 관련된 각 사안별 투쟁 속에서 각 투쟁들의 계기가 되었던 당사자들의 구체적 고통을 ‘누구나 쉽게 치료받게 하라’와 ‘제대로 치료하라’는 대중적 요구로 적극 조직해야 한다. 또한 그 요구들이 이번 개정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덜 반영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부족하거나 넘치는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 끝으로, 제도 개혁은 상층과 전문가의 몫이고 현장 투쟁은 그 현장 활동가의 몫이라는 식으로 나누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도 개혁에 활력과 현장성을 부여하는 것을 자기 과제로 삼아야 한다. 현장의 고통을 조금 더 확장된 요구로 조직해내고, 그 요구를 담아 제도 개혁의 내용과 과정에 현장의 실천적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노동보건 활동가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