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저녁은 행복하십니까
[한겨레21 2006-05-02 08:06]
[한겨레] 일자리 불안 팽배해지며 일터마다 끊임없는 경쟁, 골병들어 가는 노동자들… 사업장 ‘재해·사망률’도 양극화되며 공장은 고통스런 병동으로 전락한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영국의 경제학자 프랜시스 그린은 2001년, 1990년대 후반 영국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비틀스의 노래 제목에 빗대 “기진맥진 지친 저녁”(It’s been a hard day’s night)이라고 표현했다.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압력이 무엇이냐고 물은 당시 설문조사에서 ‘동료와의 경쟁’은 1986년 28.7%에서 97년 57%로 대폭 늘었고,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도 86년 15.3%에서 97년 29.8%로 크게 증가했다. 그린은 이 조사 결과, 노동 강도 강화가 과거에는 공장 감독자에 의한 압력이었다면 이제는 ‘동료 노동자에 의한 압력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회사에 붙어 있을 때 죽도록 일한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일자리 불안이 팽배하면서 일터마다 ‘끊임없는 경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성과가 떨어지는 생산라인은 폐쇄하겠다”는 위협이 일터를 맴돌고, 공장 한쪽에 나붙은 ‘성과 현황판’이 날마다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인력이 줄었지만 남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감을 감당해야 하고, 여기에 성과급이 유인으로 던져진다. 40대 한국인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돌연사’의 주범은 협심증과 심근경색으로 대표되는 심혈관 질환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협심증과 심근경색은 전체 심장병 환자의 10~20%에 불과했으나, 요즘은 80~90%를 차지할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노동 강도 강화에 따라 “숨이 막히고, 헉 하고 목을 죄는” 온갖 스트레스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회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아직 회사에 붙어 있을 때, 일감이 있을 때 밤낮 없이 벌어야 한다’. 저임금을 벌충하려고 잔업·특근을 시켜달라고 먼저 요구하는 판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는 365일 중 명절 10일만 빼고 날마다 일한 사람도 있고, “특근하면 쌀 한 가마 생긴다”는 말까지 퍼져 있다. 노동자 스스로 끝없는 노동의 굴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인데, 자연히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도,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노릇할 권리도 빼앗긴다. 이렇게 죽자사자 일한 뒤 직장을 떠나면 노후라도 편안히 즐겨야 하는데, 지칠 대로 지친 병든 몸은 이미 아프고 쑤시고 망가져 있기 일쑤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공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린이들은 매일 너무나 피곤해서 입맛이 없고 졸리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할 수가 없다. 부모들은 그들을 침대 옆에 앉히고 기도를 하게 하지만, 어린이들은 기도하는 동안 잠이 들어버린다”고 썼다. 당시 맨체스터 거리에서는 고단함과 비참함을 달래려고 폭음을 한 탓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노동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하루 16시간 이상 노동하던 1840년대 당시와 지금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에다가 일찍 늙어버리고 반쯤 폐병에 걸린 듯한 당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따른 근육 이완과 골격 약화로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 지금의 많은 한국 노동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전체적으로 평균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노동시간은 저임금 비정규직과 여성 노동자에게서 집중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로 이어지는 비좁은 통로를 통과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 노동 강도를 높이기도 한다. 노동자가 만든 ‘노동 규율’이다. 이런 노동 규율은 ‘재해·사망률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50명 미만 사업장의 경우 2005년에 5만9천 명의 산업재해자가 발생해 전체 재해자의 69.9%를, 사망자는 1389명으로 전체의 55.7%를 차지했다. 저임금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임금 격차뿐 아니라 재해·사망에서도 불평등을 겪고 있는 셈이다. 힘들고 위험한 일은 죄다 비정규직한테 떨어지고, 그래서 재해 확률도 더 높아지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임금은 직업이 쉬운가 어려운가, 깨끗한가 더러운가, 명예스러운가 불명예스러운가, 안정적인가 불안정한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썼다. 푸줏간 일은 잔혹하고 불쾌하기 때문에 다른 일반 직업보다 수입이 많고, 벽돌공과 석공은 매우 추운 날에는 일할 수 없으므로 이런 취업 불안정이 야기하는 불안·초조에 대해 일정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훗날 사람들은 ‘보상적 임금 격차’라고 이름 붙였다. 고통스럽고 유쾌하지 못한 직무에는 그에 따른 ‘보상 임금’(예컨대 위험 수당)이 추가로 지급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위험을 감내하고 그 대가로 더 높은 보상 임금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보상 임금’도 미국보다 한참 떨어져
보상 임금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이 ‘생명의 통계적 가치’다. 해마다 종업원 1천 명 가운데 1명이 사망하는 어떤 사업장이 있고, 이곳에서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위험을 견뎌내는 대신 요구하는 보상임금이 5천달러라고 하자. 거꾸로 보면, 재해 사망 확률을 1천분의 1만큼 더 줄이기 위해 노동자들이 저마다 1년에 5천달러씩 기꺼이 포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즉, 1년에 한 사람의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500만달러(5천달러×1천 명)를 포기하는 것이고, 이 때 이 사업장에서 노동자 한 명의 ‘생명의 통계적 가치’는 500만달러로 평가된다. 한 연구자는 한국에서 생명의 통계적 가치를 1985∼89년 연평균 5억4천만원(당시 환율로 연평균 74만달러)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미국의 한 연구를 보면, 1990년대 어떤 산업에서 노동자 한 명의 생명의 통계적 가치는 약 1100만달러라고 한다. 비교 시점은 다르지만, 한국과 미국 노동자의 생명의 통계적 가치가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건 산업재해 사망률의 큰 차이(한국이 미국의 8배)에서 비롯된다.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들은 살아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골병들고 있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공장이 ‘고통스런 병동’으로 전락하고 노동이 피폐해지면 생산도 멈추고 이윤도 늘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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