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뉴올리안즈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초대형 허리케인 앞에 처참하게 드러난 미국의 속살을 보고 당황하지 않은 대한민국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미국이 나라 밖에서 벌여온 추악한 폭력과 전쟁의 악행들을 어지간히 비판적으로 보아온 이들도, 태풍 하나를 못 이기고 주저앉은 거대한 제국의 허약함 앞에서 잠시나마 할 말을 잃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속살의 진실은 무엇이었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해 대피소에 모여 있는 이들은 온통 검은 피부의 미국인들이었다.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없는 나라에서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10%의 사람들, 백인아이들보다 시설 나쁜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이들, 성인은 물론 영아사망율조차 백인보다 높은 이들.
5%의 백인계급이 정치, 경제, 미디어를 손에 쥐고 미국을 지배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흑인과,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빈부격차, 사회분리정책 이라는 치부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동맹국’이 처한 비극 앞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원조물자와 현금을 쾌척한 동정심 많은 이 나라의 안 사정은 어떠하신가. IMF라는 허리케인이 이 땅을 휩쓸었을 때 우리는 근면성실하던 노동자, 시민이 ‘소수인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보았다. 부동산투기의 광풍에 삶과 생명을 뿌리 뽑힌 자리에는 2대8의 사회가 독한 뿌리를 뻗쳐 나가고 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울음소리는 멈출 줄 모른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노동자를 만나면서 나는 이 땅의 ‘소수인종’이 마치 IMF 이후 발견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왔음을 알았다. 나보다 한살 아래인 이 남성노동자는 편하게 얘기하자며, 자신이 스무살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않은(못한) 그는 서울이 싫어 청주로 내려가 작은 금속공장에 취직했다. 일거리가 없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후, 작은 공장을 전전하다 구두닦이 기술을 배워 잠시 업종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20대 후반에도 여전히 금속, 인쇄 일 등으로 옮겨 다니며 공장엘 다녔다.
‘일을 하고 있는데도 빨리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내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게 아니구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노동자요?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주들의 부속품이죠.’
한 공장에서는 밥 먹을 시간에 일을 하라고 해서 못하겠다고 했다가 그 자리에서 잘리고 말았다. 억울하고 분해서 잔업수당이라도 받아보려고 민주노총에 전화도 해봤지만 법적으로 어렵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사회보험 같은 것은 들어본 적도 없다. 금속 밀링하는 일이 재미도 있고, 더 배우고 싶지만 공장에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급한 대로 때우는 일이 많아서 배울 기회가 없다. 지금, 그는 목이 아파 고개가 한 쪽으로 돌아가 있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경락을 받으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일을 쉬고 싶다.
‘어머니 치과 치료비만 아니면 그만두고 싶어요. 이를 해 드려야 되는데, 내 치료비까지 들어가서 더 힘들어요.’
누나 둘과 형이 있지만, 모두들 어렵다. 막내인 그가 부모님과 함께 산다.
‘왜 대기업이 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해요? 난 15년 동안 일했어요. 세금 걷어서 이건희한테 다 주지 말고, 중소기업들 나눠줘 보세요. 지금 공고 졸업한 애들 아무도 공장에 안 들어와요. 압구정 가 보세요. 다들 거기 있어요. 나는 기술도 더 배우고 싶고, 잘 할 수도 있는데…’
‘내 사회적 위치요? 노숙자 바로 위. 여기서 한 발 잘 못 디디면 나는 그냥 노숙자예요.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고등학교를 나오고 15년을 노동자로 살아온 이가 꿈꾸는 것은 ‘노숙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대인’의 친밀감으로 말문을 틔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하고 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같은 시간을 살아냈다고 해서 유대감이나 연대감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게토’ 안에 갇혀 있었다.
그를 밀어낸 공범으로서,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흔들며 토해내던 말, ‘노숙자 바로 위’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