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한미FTA] 멕시코 ① 나프타 12년 명암

[한겨레 2006-05-23 11:15]

[한겨레] [한-미 FTA 집중탐구: 1부-다른 나라에서 배운다]
멕시코-① 나프타 12년 명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은 흔히 ‘제2의 개항’에 비유된다. 우리 사회와 경제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수 있는 폭발력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 추진을 둘러싼 찬반 양론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이 협정을 맺고 난 뒤 우리 사회의 모습, 국가적 이익의 관점에서의 엄밀한 득실계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한겨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집중탐구’ 시리즈의 제1부로 이미 앞선 길을 걸어간 나라들의 실상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 보고자 한다. 이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들뿐 아니다. 미국과 협상을 중단한 나라의 경험도 우리에게는 값진 교훈거리다. 이들 나라의 현지 취재를 통해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올 대차대조표, 그들이 한국에 던지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당사국인 미국 내의 자유무역협정 반대 목소리를 미국 정부가 어떻게 협상전략으로 활용하느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1부가 끝나는 대로 분야별로 자유무역협정이 몰고올 파고, 외교·안보적 영향,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노선 등을 2, 3부로 이어서 집중탐구할 예정이다.

농민 130만 땅 잃고 도시로…불법 노점 정부청사 에워싸

생존의 몸부림은 법과 제도보다 앞서는 것일까?

주말 멕시코시티 거리에서는 그랬다. ‘시의 배꼽’인 소칼로광장 주변 도로는 언제나 노점상들로 가득차 있다. 대통령 영빈관을 비롯해 주청사와 시청,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등 멕시코 상징물들을 포위하다시피 하고 있다. ‘코메르시안테스 암불란테스’(무척 많은 행상들이란 뜻)로 불리는 이 노점상들은 모두 불법 영업자들이다. 멕시코 일간신문 <엘 우니베르살>은 멕시코시티에는 이런 불법 노점상들이 6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파는 물건들은 복제 시디, 유명 상표를 도용한 물품 등 대부분 불법제품이다. 그런데도 노점상들 옆에 즐비하게 서 있는 경찰들은 뜨악하게 쳐다볼 뿐 단속에 손을 놓고 있다.

노점상들은 대부분 멕시코 남부 농촌 출신들이다. 멕시코 통계청 추정으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농업 부문 이탈자 수가 1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도시로 밀려온 사람들이다.

수출 증가 뒷편 저성장 그늘…생존 몸부림

멕시코는 지난 92년 12월 미국·캐나다와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을 맺어 94년 1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나프타 발효 후 ‘마킬라도라’(보세혜택이 있는 수출임가공공장)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제조업은 대미 수출호조로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멕시코 북부지역의 채소, 열대과일, 화훼농가들은 거대시장인 미국에서 몰려오는 주문으로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 옥수수 가루로 얇은 빈대떡처럼 만든 토르티아·타코·케사디아 같은 멕시코 전통음식들은 이제 미국 남서부 식당가에서 흔히 보는 메뉴가 됐다. 황금빛 투명한 병에 담긴 멕시코산 코로나맥주는 하이네켄과 함께 미국 맥주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고 있다. 대신 1억600여만명의 멕시코 국민들은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에 ‘전세계 최대 콜라 소비시장’을 선물했다. 미국과 멕시코는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경제적으로는 한몸이 되어가고 있다.

컨설팅회사 퍼블릭스레티지스의 루이스 델 라 카예(46) 대표는 “나프타를 계기로 멕시코가 북미와 남미를 잇는 국제적 상업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말했다. 멕시코 경제부 국제통상담당 차관보를 지낸 그는 나프타 체결 당시 멕시코 쪽의 실무협상 주역이었다. “나프타 발효 전에는 한 달 평균 수출액이 50억달러 정도였으나 올해 2월에는 200억달러를 넘어섰다. 수출품목도 1차 상품 위주에서 섬유·자동차·전자 등 공산품 중심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나프타 이후 시장개방에 자신감을 얻은 멕시코는 2003년 11월까지 무려 32건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대통령 경제보좌관실의 후안 카를로스 베이커 나프타 이행평가담당 국장은 “수출과 제조업 생산성 증가,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멕시코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개발도상국인 멕시코가 나프타 가입으로 단숨에 선진국과 동등한 자격을 얻으면서 제도와 관행도 빠르게 선진화하고 있다”며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강조했다.

공유지 잃은 농민 알몸 시위…어린이 노숙자 10만명 넘겨

그러나 멕시코시티 거리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나프타의 효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짙은 그늘이 가득했다. 멕시코시티의 또다른 중심가인 레포르마 대로에서는 요즘 주말마다 수십여명 여성들이 번갈아 알몸시위를 하고 있다. 멕시코 동부 베라크루스주에서 올라온 1천여명의 농민들이다. 이들은 정부가 마을의 농지공유지(에히도)를 없애는 바람에 삶터를 잃었다고 하소연했다. 멕시코 정부는 나프타 체결 직전 미국의 ‘선결 요구’에 따라 농지 공유제도를 폐지했다.

멕시코시티에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곳곳에 어린이 노숙자들이 눈에 띈다. 이들이 낮에 하는 일은 주로 자동차 청소다. 지나가는 차들이 멈추면 느닷없이 다가와 이리저리 닦아주고 주는대로 돈을 받는다. 유니세프의 최근 조사 결과, 멕시코 전체에 이런 어린이 노숙자들이 1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멕시코 정부는 나프타 체결 당시 ‘좀더 많은, 좀더 좋은 일자리’를 약속했다. 실제로 나프타 발효 뒤 2000년까지 7년 동안 50여만곳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 내수위주의 중소기업, 도시 자영업, 농민 등 개방에 취약한 계층들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렸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경제의 침체로 제조업의 고용창출 능력도 떨어졌다. 그 결과는 ‘질 낮고 불안전한 일자리의 양산’이다. 멕시코 정부의 공식 통계로도 지난해 신규 취업자 10명 가운데 7명이 비정규직이다. 절대빈곤 계층으로 분류되는 인구도 전체의 31%에 이른다. 멕시코칼리지의 알베르토 아로요 교수(경제학)는 “나프타가 거대 초국적 기업들과 일부 수출 대기업에만 혜택을 줬을 뿐 국가경제 전체로는 ‘심각한 양극화와 저성장’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내부 산업연관 붕괴” 수출-성장 엇박자

저성장은 원인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내부의 산업연관 체계가 무너진 데 있다.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의 수출이 성장을 이끌고 있지만, 이들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만 활용할 뿐 대부분 원부자재와 부품을 중국 등 멕시코 이외 지역에서 들여온다. 나프타 체결 후 멕시코의 교역량이 급증했으나 98년 이후 한번도 무역수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업·지역·계층간 양극화는 멕시코 국민들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멕시코 사회보험청이 집계한 2004년 최상위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만908페소(약 350만원)로, 최하 1분위 가구의 1912페소(16만원)와 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멕시코 국립자치대의 카를로스 우스캉가 교수(국제관계학)는 “국내외 정치환경이나 경제사정으로 봐서 당시 나프타가 멕시코 정부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하지만 국민들을 잘살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분명히 적절한 정책수단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양극화에 대한 멕시코 경제관료들의 의견은 다르다. 퍼블릭스테리티지스의 루이스 대표는 “어떤 경제정책도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현상도 생기게 마련”이라면서 나프타 이행과정의 양극화를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후안 카를로스 대통령 경제보좌관실 국장은 “소득 양극화는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의 문제이지 나프타 때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성장잠재력 높이기’와 ‘양극화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우리 정부의 계획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멕시코시티/글·사진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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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본 멕시코의 12년

외국인 직접투자 2천억달러…통화위기 옛말
연평균 성장률 1.43% 중남미 나라중 16위

나프타가 지난 12년여 동안 멕시코에 준 선물은 수출과 외국인 투자유치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해 수출액은 2127억달러로 나프타 발효 직전인 1993년(518억달러)에 견줘 4배 이상 늘었다. 전체 수출에서 미국시장 비중이 85.7%를 차지해, 나프타의 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94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외국인 직접투자는 모두 2033억달러로 연평균 185억달러의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외환보유고도 687억달러로 늘어났다. 83년과 94~95년, 10년 주기로 반복됐던 멕시코의 통화위기는 이제 확실한 과거사로 넘어갔다는 게 멕시코 정부의 평가다.

하지만 성장지표는 저조하다. 멕시코 중앙은행이 집계한 연도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보면, 94년 이후 2005년까지 연평균 1.43%에 불과하다. 멕시코가 2차 세계대전 후 70년대 초반까지 강력한 보호무역(수입대체산업화전략)을 펼쳤던 시기나 76년부터 82년까지 석유수출호황기의 연평균 3%대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멕시코칼리지의 알베르토 아로요 교수(‘자유무역에 관한 멕시코행동연대(RMALC)’ 이사)는 “94~2003년에 중남미 32개국의 연평균 성장률을 비교하면 멕시코가 16위”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말 공식 실업률은 3.6%로, 통계상으로 보면 고용이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용의 질이 문제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노동연구·교육원(CILAS) 연구원은 “멕시코 전체 경제활동인구 4600여만명 가운데 사회보험을 적용받으며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1300만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3300여만명이 임시직이나 지하산업 등에 불완전 고용 또는 사실상 실업상태로 있다”고 전했다. 또 취업자 10명 가운데 4명이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다. 아예 소득이 없으면서 취업자로 분류되는 무급가족종사자도 지난해 말 현재 390여만명에 이른다. 나프타 이후 가장 활기를 띠고 있다는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주머니 사정은 더 나빠졌다. 93년의 실질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2005년의 제조업 실질임금은 72.3에 머문다는 게 멕시코 통계청의 공식 발표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멕시코 하원 빅토르 수아레스 의원
“농업부분 너무 많이 양보
지금은 외국기업이 지배”

멕시코 정부는 2003년 11월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끝으로, ‘더이상 협정추진은 없다’는 이른바 ‘에프티에이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다. 나프타 체결 뒤 무려 32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뒤 나타난 부작용에 대한 국내 반발이 워낙 심해졌기 때문이다. 오는 7월2일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나프타 재협상’ 요구도 나오고 있다. 식량주권 및 지속가능한 농촌개발을 위한 연구센터(CEDES)의 위원이자 멕시코 하원의 경제·통상·농업위원회 위원인 빅토르 수아레스 의원(민주혁명당)이 대표적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 정치인이다.

-나프타 체결 당시에는 지금 나타나는 부작용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는가?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체결 직전까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강력한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추진했던 카를로스 살리나스 당시 대통령이 측근 경제관료들과 개인적으로 잘 아는 몇몇 기업인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의회조차도 비준 직전에 방대한 협상자료를 넘겨받아 제대로 검토하지도 못하고 통과시켰다.

-그래도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의회에서 비준한 것 아닌가?

=정부는 외국인 투자 확대를 강조했다.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미국과 손잡으면 멕시코가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환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이런 정부 홍보가 먹혀들었고, 당시에는 집권 여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해 의회 저지가 불가능했다.

-세부적인 협상 실무절차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원천적으로 동등한 협상이 될 수 없었다. 거대 경제대국인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1988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서로 공조하면서 멕시코를 협공했다. 멕시코의 협상 실무진은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미국식 경제논리에 경도된 경제관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프타 협상은 미국 사람들끼리 이뤄졌다’는 농담도 한다.

-멕시코에 대한 나프타의 가장 큰 부작용을 꼽는다면?

=협상팀에서 농업 부문을 너무 많이 양보하는 바람에 피해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농업은 단지 경제논리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농산품은 일반상품과 달리 문화이고, 사회안전망이며 국민의 생존 기반이다. 이런 중요한 영역이 지금은 외국 기업의 지배에 놓여 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한국에 조언을 한다면?

=미국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때 항상 과거 협정을 최소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회에서 통과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과 이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여러 나라의 경험을 교훈 삼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예상되는 긍정적·부정적 효과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내부 이해당사자들 간의 협의가 협상보다 더 중요하다.

멕시코시티/글·사진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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