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한미FTA] 캐나다 ② 흔들리는 복지국가
[한겨레 2006-05-30 19:45]
[한겨레] [한-미 FTA 집중탐구: 1부-다른 나라에서 배운다]
캐나다-② 흔들리는 복지국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브루노 실라노(40) 부부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돌이 갓 지난 딸을 키우고 있다. 지난 24일 저녁 식탁에 마주앉은 부부는 “아침마다 세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여서 제시간에 초등학교와 유치원, 보육시설에 데려다 주려면 한바탕 소동을 치르게 된다”며 웃었다. 실라노 부인은 막내를 출산한 뒤 52주 동안의 휴가를 쓴 뒤 최근 공립 보육시설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딸아이는 무상으로 운영되는 또다른 공립 보육시설에서 낮시간을 보낸다. “출산휴가 52주에다 무상으로 아이를 키워주는 좋은 나라”라며 부러워하자, 부부는 뜻밖에도 “앞으로는 그럴 것 같지 않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새 보육제도에 불만을 털어놨다.
경쟁·효율에 내몰려 복지 ‘하향평준화’
캐나다 정부는 그동안 6살 미만 어린이를 공립 보육시설에서 무상으로 맡아주는 보육제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올 7월부터는 부모가 자녀를 보육시설에 보내든지, 정부의 지원금을 받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정부 지원금은 어린이 한 명에 해마다 1200달러(우리돈 100만원 정도) 정도다. 실라노 부부는 이 제도를 놓고 여러차례 의논한 끝에 딸을 공립시설에 계속 보내기로 했다. 한 달에 100달러 정도의 지원금으로는 아이를 제대로 된 사설 보육시설에 맡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육시설이냐 지원금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게 우리 처지에서 보면 무척 ‘행복한 고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캐나다 부모들은 보육제도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실라노 부인은 “지금까지는 국가가 책임지고 아이를 키웠지만 이제는 보육을 개인의 일로 넘겨버리고 있다. 공립 시설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 것이고 ‘보육 시장’에 뛰어드는 사립시설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공립 보육시설의 수준이 예전보다 훨씬 떨어지면서 어린이 보육이 점차 사립시설들의 몫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다. 그는 또 “형편이 어려운 부모들이 정부 지원금을 생활비로 쓰거나 심지어 술·담배를 사는 데 써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정에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 뻔한데도 정부가 새 제도를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실라노 부부는 보육뿐만 아니라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무상의료를 원칙으로 하는 캐나다의 의료보험 제도에 하나씩 예외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자기 돈을 내면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원하는 치료를 해주는 병원이 생겼다. 건강에 반드시 필요한 진료보다는 성형수술이나 값비싼 검사만 주로 하는 의원들이다. 공공의료 체계에 문제점이 드러나자 개혁을 하는 대신 영리법인에 맡기는 방법으로 의료서비스의 공백을 해결하려고 한다.”
실라노 부부의 걱정 섞인 비판처럼 그동안 캐나다가 자랑해 오던 탄탄한 복지국가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뒤 사적 영역에 의존하는 미국식 복지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탓이다. 캐나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캐나다의 복지가 미국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복지의 후퇴는 캐나다의 각종 사회통계를 보아도 잘 나타난다. 국내총생산에서 사회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993년에는 21.6%였다가 2001년에는 17.8%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치가 21.8%에서 20.8%로 줄어든 것과 견주면 캐나다의 감소폭이 네 배 가까이 더 크다. ‘캐나다 정책대안센터’의 분석을 보면, 전체 실업자 가운데 실업급여 혜택을 받는 비율도 89년 75%에서 2002년에는 38%로 뚝 떨어졌다. 보건의료예산 등 각종 공공서비스 지출에서 미국과의 격차도 계속 좁혀지고 있다.
새로 도입하려는 사회보장 정책이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로운 시장접근과 경쟁 논리에 밀려나는 경우도 많다. 93년 온타리오주가 공공 자동차보험을 도입하려다가 미국 보험회사들의 문제제기로 포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캐나다 공공노조 셀리 고든 연구원은 “공공성을 바탕으로 운영되던 제도나 기관들이 이제는 시장논리에 물들어 효율성만 찾고 있다.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대거 민간 용역업체로 옮겨갔다. 성장은 둔화하고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마저 줄어들면서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예전 같은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토론토/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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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10% 소득 31% ↓…성장률도 추락
1989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이후 각종 경제통계를 살펴보면, 자유무역협정이 캐나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캐나다의 1인당 국민소득은 85년 미국의 77% 수준이던 것이 10년 만에 68% 수준까지 떨어졌다. 시간당 8.8달러 이하를 버는 성인 남성의 비율은 89년 7.9%에서 93년에는 8.9%로 늘었고, 같은 기간 시간당 27.6달러를 버는 비율은 9.3%에서 11.6%로 늘어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됐다. 자유무역협정 발효 직후부터 93년 사이 하위 10%에 속하는 남성 노동자의 연간 실질소득은 무려 31.2%, 하위 20%는 20.2% 줄었다. 상위 20%는 연간 실질소득이 2%만 떨어졌다.
분배의 악화는 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집계한 회원국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감 추이를 보면, 캐나다의 경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89년부터 10년 동안 연평균 2.1% 증가에 그쳐, 이전 10년 동안(1979~1988년)의 연평균 증가율 3.1%보다 1%포인트 주저앉았다. 같은 기간 회원국 평균치(2.6%)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어서 성장둔화의 요인을 일시적 세계경기 침체 등 다른 외부환경 탓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발효 전 10년 동안에는 캐나다의 증가율이 회원국 전체 평균치(2.9%)를 웃돌았다. 캐나다의 경제성장이 다른 회원국들에 뒤지는 양상은 94년 나프타 발효 뒤 10년 동안에도 이어졌다.
박주희 기자
“교육마저 미기업 손에 넘어갈까 우려”
비시주 교사연맹 래리 퀸 “교사평가 미국회사가 맡아 교육내용 좌지우지할 것”
지난 5월 둘쨋주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비시주)에서는 캐나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시험을 교사노조가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교육부가 2000년부터 4~7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기초학력 평가시험을 비시주 교사연맹이 학부모들을 설득해 반대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래리 퀸 비시주 교사연맹(BCTF) 연구 책임자는 “획일적인 평가 시험이 교실 안의 학습 내용까지 바꿔놓고 있다. 지금 정부가 쥐고 있는 평가권이 세계화, 특히 나프타 서비스 규정에 따라 미국 기업의 영업활동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반대 이유를 밝혔다.
퀸은 교육 평가권이 상업화된 온타리오주의 사례를 들었다. 온타리오주 교육부는 2001년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5년 주기로 7개 분야에서 ‘교사 자질 평가제’를 시작했다. 주 교육부는 미국 뉴저지에 있는 교육테스트 서비스 회사와 2년 동안 260만달러에 계약을 맺어 시험 출제와 평가를 맡겼다. 주 정부가 바뀌면서 결과는 폐기됐지만 나프타의 서비스 규정에 따라 공립 교사에 대한 평가권이 미국의 사기업에 맡겨진 사례로 남았다.
“비시주에서도 새로 뽑힌 교사들에 대한 심리테스트를 미국 회사가 맡고 있다. 평가를 사설 회사에 맡기는 것은 단순히 교육 상업화 문제가 아니다. 평가권을 이용해 정보를 축적한 교육기업이 캐나다 교육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교육내용은 평가방식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에서도 미국은 평가권에 해당하는 ‘테스팅 서비스’의 개방을 한국 쪽에 요구하고 있다.
밴쿠버/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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