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WTO 농업 협정은 전세계인의 건강과 식량주권을 위협하고 있다
– 고 이경해님의 시신을 맞으며

1. 지난 9월 15일, WTO 5차 각료회의가 어떠한 합의도 없이 결렬되었다. 협상에 어려움이 있을 것은 익히 예상되던 바였지만, 이와 같이 회의가 결렬된 것은 다국적 기업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몇몇 선진국의 비인간적 세계화 압력에 맞선 전세계 민중들의 투쟁에 힘입은 바 크다.

2. 이번 회의에 제출된 의제 중 다국적 기업의 이해만을 대변할 뿐 전세계 민중의 인권과 건강권을 침해할 가능성을 가진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회의의 중요한 의제였던 농업 부문 협정이 대표적이다. 식량의 효율적 생산과 배분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진행되고 있는 농업 협정은 생태계와 전세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거대한 농업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의 배만 불리기 위한 것이다.

3.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업 협상의 타결은 생태계 파괴를 의미한다. 세계 시장을 위해 대규모로 재배되는 농작물은 현재도 땅을 황폐화시키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보다 싼 가격에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다국적 기업은 땅을 비롯한 자연을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농업 형태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WTO 농업 협상은 전세계 농민들을 빈곤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각종 보조금의 혜택을 입으며 대량 생산되어 싼 가격에 공급되는 다국적 기업의 농산물은 소규모 농장 및 가족농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대체하고 있다.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판매할 곳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빈곤에 허덕이다 못해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농산물을 불태워 버리고 죽음의 길을 택하는 농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멕시코 칸쿤에서 산화해 간 고 이경해씨는 그러한 전세계 농민들의 처지를 자신의 죽음으로 웅변하였다.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농업 협상은 전세계 민중의 건강을 희생 제물로 삼고 있다. 대량 생산과 원거리 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기업농업에 의해 생산된 농산물은 알려진 바와 같이 대량 살포된 농약으로 인해 전세계 민중의 건강을 위협한다. 또한 유전자조작식품을 비롯한 불량식품의 생산으로 비만 등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농업은 농업 기업에 고용된 농업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착취와 건강 침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다국적 농업 기업에 고용된 제3세계 농업 노동자들은 엄청난 규모로 살포되고 있는 농약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이환되고 있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편 이들 다국적 기업은 ‘공정한’ 세계시장을 외치고 있지만, 그들의 생산 및 유통 형태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받고 있고, 그에 힘입어 생산원가보다도 싼 가격에 자신의 생산물을 유통시키고 있다. 이들의 무역 형태는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시장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4. 이와 같이 전세계 민중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뿐더러 공정하지도 않은 WTO 농업 협정을 체결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거부되어야 한다. 전세계 민중의 요구에 따라 WTO 협상에서 농업 부문은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양자간 진행되고 있거나 예정되어 있는 양자간 협정에 주목하며 식량이 다른 상품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모든 협정에 대해 반대한다. 우리는 민중의 건강과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그리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세계화를 위하여 농민들과 힘을 모을 것을 다시한번 밝힌다.

5. 우리 보건의료인들은 오늘 고 이경해님의 시신을 맞으며 민중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노력이 건강한 식량생산과 분배를 위한 노력을 포함해야 함을 다시한번 되새긴다.

2003. 9. 16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