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정부는 노동자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1993년 4월 28일, 태국의 케이더(Kader) 장난감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노동자들은 밖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공장문은 밖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혹시라도 공장의 인형을 훔쳐 갈까봐 회사 관리자들이 문을 밖에서 잠갔기 때문입니다. 이날 화재로 18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중 174명이 여성노동자였고 많은 수가 미성년의 어린 노동자였습니다.

끔찍했던 노동자 죽음이 있었던 4월 28일은 이제 세계 모두가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을 기억하고, 이윤 때문에 무참하게 짓밟히는 노동자 건강과 안전을 요구하는 공동행동의 날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매년 220만 명, 하루에 5,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전쟁에 의한 희생자 수보다 많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 날은 죽은 자를 기억할(Remember the Dead)뿐 아니라, 산 자를 위해 투쟁(Fight for the Living)하는 결의를 다지는 날로서, 세계에서 노동자 생명의 존엄성을 재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산재사망률로 한국은 OECD 국가 중 1,2위를 다툽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의 가족들과 그 대책위가 아직까지 힘겨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8년 1월 7일 이천의 냉동 창고 화재로 40명의 노동자가 죽어야했습니다. 해고로 인한 쌍용차 노동자들의 자살과 죽음이 연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4대강 속도전으로 건설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가을에 제철소에서 일하던 29살 용광로 청년을 기억합니다. 10만원짜리 안전펜스만 있었어도 살 수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대학입학을 앞두고 피자배달하다 사망한 청년도 기억합니다. 불안한 고용 상태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다 죽어가는 하청 노동자가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노동자들은 오늘도 목숨을 내걸고 일하고 있습니다.

2010년 한 해에도 한국에서 2,2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죽었습니다. 하루 6명의 노동자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공식 통계로 집계되지 않은 산재 사망이 적지 않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죽지는 않더라도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이들도 많습니다. 공식 통계상 2010년 한 해에 98,645명이 산재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매우 축소된 숫자입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매년 산재로 죽거나 다친다고 합니다.

복지국가 담론이 한창입니다. 무상의료, 무상급식, 무상교육 등 무상복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OECD 산재사망 1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추진되는 복지는 그 가능성과 진실을 의심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복지국가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와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노동조건 확보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 3월, 국제노동기구(ILO) 전문위원회는 전 세계 국가의 국제노동기구 협약 이행 상태를 점검하였습니다. 각 나라가 비준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평가한 것입니다. 한국은 이 평가에서 제155호 ‘산업안전 보건 협약’ 및 제187호 ‘산업안전 보건 증진체계 협약’ 이행 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요구받았습니다. 특히 법령 위반에 대한 적절한 제재의 규정, 재해 예방을 위한 교육, 훈련 과정 마련, 정책 입안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 보장, 재해 예방을 위한 정부의 책임 및 역할 항목에서 충실한 협약 이행을 의심받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산재 예방을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는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성 질환과 사고는 원칙적으로 예방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산재는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피할 수 있는 결과임에도 이를 방치하거나 동조함으로써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게 만든다면 이는 비윤리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묵과한다면 이는 범죄 행위입니다. 더 이상 억울하고 서러운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업이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정부가 기업을 철저히 규제하고, 법을 어긴 기업을 엄하게 처벌한다면, 이러한 죽음을 멈출 수 있습니다.

제2, 제3의 용광로 청년이 없길, 속도경쟁에 죽어가는 배달노동자가 없길, 과로로 쓰러져 죽어가는 노동자가 없길 바랍니다. 그 어떤 것도 이들의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1. 기업과 기업주는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책임을 준수해야 합니다.
2. 정부는 기업과 기업주가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책임사항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보다 엄격하게 감시하여 더 이상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3.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등한시 한 기업과 기업주에게 보다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합니다.

일터에서 일하다 생명을 잃은 모든 노동자의 명복을 빕니다.

201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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