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 과도한 감시로 노동자 집단 정신질환 발병”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 정신질환 집단 산재신청

2005-05-10 오후 2:49:26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 조합원 13명 전원이 10일 오전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란 진단을 받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인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조합원 전원 집단 정신질환 발병 및 산재 신청이라는 초유의 사태 이면에는 노조활동을 이유로 사측의 조직적인 감시·폭행·차별이 자리잡고 있어 파문이 일고 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노조, 조합원 전원 정신질환 발병-집단 산재신청

산재신청에 앞서 이날 서울 근로복지공단 앞 노조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건강상태에 대해 진술했다.

지난 2002년 40일간 단식농성 끝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병원 신세를 졌던 김혜진 위원장은 “뒷목이 뻣뻣하고 울화가 이유없이 치밀고, 편두통과 안면근육이 마비되는 느낌이 있다”며 “투쟁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감으로 잠조차 제대로 이루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 조합원은 “현장 관리자들의 행태 때문에 화가 나면 호흡이 가빠져서 숨쉬기조차 힘들다. 손발이 저리고 소화도 안된다”며 “청심환, 두통약 등 약도 많이 먹었다. 몇 개월 사이에 체중이 7~8kg이나 빠졌다”고 토로했다.

민주노총, 금속연맹, 민주노동당, 노동건강연대 등 노동단체들은 10일 오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조합원 감시와 차별로 인한 집단정신질환 해결을 위한 공대위’를 발족했다. ⓒ프레시안

또다른 조합원은 “때때로 살인 충동마저 느낀다.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오고 화병이 나서 죽겠다. 심적으로 굉장히 거칠어져 있음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이밖에도 조합원들은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등을 이구동성으로 호소했다. 이들은 지난해 9~11월에 걸쳐 조합원 전원이 ‘우울증을 수반한 적응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산업 보건의)는 “‘적응장애’는 근무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질병”이라며 “직장 스트레스가 장기화되면 우울증까지 동반하게 되고, 일정 수준을 넘어 고착화될 경우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조, 사측의 전방위적 감시-차별이 정신질환 발병 불러왔다”

조합원 전원이 정신질환 진단을 받게 되기까지에는 사측의 조합에 대한 전방위적 감시·차별·폭행이 있었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노조에 따르면, 사측은 40명 생산직 직원 중 13명의 노조원들만 별도생산 라인에 배치해 상시적 감시를 해왔다.

한 조합원은 “과장, 반장이 돌아가며 노조원들의 생산라인만 40~50분씩 감시 감독을 하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면 돌아올 때까지 주시하고 있다”며 “(근무시간 중)휴대폰을 받거나 걸어도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조합원은 “일하고 있을 때 관리자가 뒤에 서서 몇십분씩 지켜보고, 조합원들 생산 라인만 주위를 계속 맴돌며 감시한다”며 “조합원과 비조합원이 일상적으로 같은 작업할 때도 조합원들에게만 유독 지적이 많다”고 호소했다.

CCTV. 녹음기까지 동원해 노조원 감시

사측은 관리자 배치를 통한 감시활동에서 한 발 나아가 CCTV, 녹음기를 이용해 조합원들을 감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주 노조 부위원장은 “현장 입구, 출퇴근 카드기 주변, 식당입구, 총무과 사무실 등에 모두 20여대의 CCTV가 조합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며 “조합원들은 언제 어디서 사진이 찍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에 상시적으로 떨고 있다”고 말했다.

생산 라인에서 관리자와 언쟁이 있을 때 앞장서는 편이었다는 한 조합원은 “그간 쌓인 감정이 통제가 안돼 관리자와 심한 마찰이 있었을 때, 사측이 이후에 CCTV 사진과 녹음기록을 주요 증거물로 제시하는 것을 본 이후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도 제대로 말싸움조차 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정 부위원장은 “노조의 요구로 작업장에는 CCTV가 철거됐지만, 조합사무실과 식당, 출입구에는 여전히 설치가 돼 있다”며 “조합원들이 내부적으로 한 이야기 조차 어떤 경로인지 몰라도 곧장 총무과로 전달될 정도”라고 주장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는 사측의 전방위적인 노조 감시와 차별 때문에 조합원 13명 전원이 ‘우울증을 동반한 적응장애’가 발병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인정 신청서를 10일 제출했다. ⓒ프레시안

근로복지공단, 산재신청 받아들일까?

한편 근로복지공단이 이들의 산재 신청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관건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지만, 발병과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산재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직무상 스트레스로 생긴 우울증·불안장애 등으로 산재 판정을 받은 건수는 68건이다. 2000년 27건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직무상 스트레스를 인정해 산재 인정을 받은 대표적 사건은 지난 2003년 청구성심병원 조합원 8명이 “사측의 노조탄압으로 집단 정신질환에 걸렸다”는 산재 신청이 인정된 것과 지난해 KT 전 직원 박모씨(51. 여)가 “사측의 감시·감찰로 우울장애가 발병했다”며 산재 신청한 것을 근로복지공단 전주지사가 받아들인 사건이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도 청구성심병원과 KT 사례와 매우 유사한 경우라고 판단,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인정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유사 사례 중에도 업무 관련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기각된 사례도 다수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동건강연대 한 관계자는 “과거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산재 인정 건수가 늘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인 부분”이라며 “하지만 산재 인정은 최종 결과가 나와봐야 아는 만큼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경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