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의자에 앉아도 될까요?”
민주노총, ‘서비스 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시작
2008-03-19 오후 5:58:58
“화장실이요? 고객이 계속 매장 안에 계시면 무조건 참아야죠.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다리가 늘 많이 저려요. 고객 상대할 때 뿐 아니라 서류 정리할 때도 서서 일하는 걸요. 몇 개월만 일하면 밤에 잘 때도 다리가 저려서 잠을 잘 못 자죠.”
로레알 코리아에서 한 백화점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던 양미원 씨는 서비스 노동자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술술 털어놓았다.
“고객이 없을 때라도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양미원 씨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다. 백화점의 판매직 노동자, 대형 할인매장의 계산원, 고속도로 휴게소의 판매직 노동자, 호텔 서비스 노동자 등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이렇게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무려 350만 명에 달한다.
아침 출근부터 저녁 퇴근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해 민주노총이 19일 “서비스 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하지정맥류·불임 등 드러나지 않게 ‘골병 드는’ 서비스 노동자
▲ “고객이 없을 때라도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로레알 코리아에서 한 백화점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던 양미원 씨는 서비스 노동자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술술 털어놓았다. ⓒ 정기훈 기자
서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의 건강권에 주목한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참 늦었다. 제조업 노동자의 산업 안전, 건강권 문제에 가려 최근 들어 규모가 커진 서비스업의 현실에 눈길이 미치지 않았던 것.
하지만 서비스 노동자 대다수는 양미원 씨처럼 직업으로 인한 각종 질병을 호소하고 있다. 단순히 “서서 일하니 힘들고 피로하다”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 하지정맥류나 다리와 발의 근골격계 질환, 심혈관계질환, 조산이나 유산 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일반 산업재해처럼 날카로운 것에 베이고 잘리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비스 산업에서도 산업재해가 많다”며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연구 결과조차 없다”
이들 서비스 노동자의 산업재해 인정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말 그대로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도 자신의 병이 ‘산업재해’라는 인식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몰라서, 혹은 복잡한 절차로 인해 신청을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아직까지 관계기관의 인식 수준도 미천하다.
산업의학을 전공한 윤간우 녹색병원 의사는 “하지정맥류는 일부 사업장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된 경우가 있지만 매년 10건 미만이며 방광염의 경우 아직까지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정맥류 뿐 아니라 방광염도 화장실에 갈 필요가 있는데도 업무상 갈 수 없는 노동환경 때문에 생기는 병인만큼 산업재해 인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산업재해 인정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서비스업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한 연구마저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 있다. 이날 기자 회견장에서 배포된 참고자료는 모두 외국의 사례를 검토한 것이었다.
이 자료 가운데는 영국의 한 교수의 연구 결과도 실려 있다. 카렌 메싱 교수는 “계속 서서 일하는 경우 심혈관계질환이 있던 사람은 증상이 더 악화될 수 있으며 하지정맥류나 만성정맥부전증도 발생할 수 있으며 앉아서 일하는 사람에 비해 요통이 2배 정도 높게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김신범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교육실장은 “관련된 자료도 없는 것이 지금 한국 서비스 노동자가 처해 있는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 아침 출근부터 저녁 퇴근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민주노총이 19일 “서비스 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 정기훈 기자
의자 없는 일터는 ‘놀랍게도’ 위법…”이명박을 믿는다”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이미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일을 법으로 정해 놓았다.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안전보건기준에관한규칙 제277조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때에는 당해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물론 이 같은 법을 지키는 사업자는 거의 없다. 서비스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들의 “앉아서 일할 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비스 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을 시작하며 이석행 위원장은 “대통령이 매번 법과 원칙을 얘기하는데 ‘의자 제공’은 법에도 나와 있는 것이니 정부가 도와주지 않겠냐”고 꼬집었다.
앞으로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은 구체적인 유통서비스 여성 노동자의 노동 환경 실태 조사부터 시작해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사회 이슈화할 계획이다.
민주노총은 산업의학전문인, 여성사회학자, 인간공학전문가 등 8명으로 구성된 ‘유통서비스여성노동자 건강권 추진 기획단’을 구성해 의자 제공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간다. 오는 5월까지 서울 지역 백화점 노동자 1000명을 대상으로 근육 피로도 실험 연구 등을 벌이고, 이를 토대로 10월까지 ‘서비스 여성 노동자를 존중하는 의자’ 제작 등 각종 캠페인을 벌인다.
또 서비스 노동자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백화점과 할인매장에는 “서비스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업장”이라는 현판을 수여하고 의자 제공에 동의하는 고객 선언도 이끌어낼 계획이다.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의자 놓기 투쟁’이 아니라 ‘캠페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문제를 사용자와의 대립적 구도가 아니라 고객의 이해 속에서 추진해 나가겠다는 의미”라며 “각종 연구를 통해 앉아서 일한다고 생산성이 낮아지지 않음을 증명해 서비스업종의 의자 놓기 사업을 확산시키겠다”고 밝혔다.
여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