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산재예방정책
재해발생 규모, 원인조차 모른 채 처방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08-03-31

최근 4년 간 정부가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쏟아부은 돈은 1조원이 넘는다. 그런데도 산업재해율은 2004년 0.85%, 2005년 0.77%, 2006년 0.77%, 2007년 0.72%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정부는 2000년부터 5년 단위로 산재예방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노동부는 당시 “산업재해를 줄여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 수준을 선진국에 근접시키겠다”며 “2004년에는 산업재해율 0.61%에 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 목표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는 2005년 발표한 2차 산재예방 5개년 계획에서 2009년 산업재해율 목표치를 0.6%로 제시했지만 이 역시 지키지 못할 공산이 크다.

산재예방 정책의 대표적인 사업은 영세사업장에 안전시설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클린사업이다. 이 사업은 연간 1천억원이 투입돼 산재예방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50인 미만 영세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업체당 3천만원 한도 내에서 안전시설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하지만 클린사업은 2001년 시작돼 올해로 7년째를 맞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사업을 주관하는 산업안전공단은 클린사업장의 재해자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클린사업 혜택을 받은 사업장의 경우 재해자수가 20~30% 정도 줄어드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연간 1천억원 클린사업, 효과는?

그러나 영세사업장 시설에 투자를 하다보니 부도나 폐업이 잦아 대표적인 예산낭비 사업으로 꼽히기도 한다. 2001년 10월부터 2006년까지 클린사업 자금지원을 받은 사업장 2만4천530곳 중 부도나 폐업한 사업장은 1천576곳. 이곳에 투자한 165억원이 무용지물이 됐다. 특히 자금지원이 이뤄진 뒤 2년 이내에 부도를 맞는 업체가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거액의 예산이 제대로 효과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윤조덕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산재취약계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생성과 소멸이 잦은 영세사업장에 투자하는 클린사업은 대표적인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 윤 연구위원은 “산재예방 정책이 적재적소에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조선업이나 건설업처럼 상대적으로 산재발생 비율이 높은 사업장에 중점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재예방 정책이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가 산재발생 규모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산재통계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보상 자료만을 근거로 산출된다. 따라서 전체 산재사고의 일부만 반영된다. 게다가 산재통계가 실제 산재건수 중 얼마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연구결과도 없다.

최근 들어 이진석 서울의대 교수가 2006년 발생한 직업성사고 총 285만2천336건 중 산재보험이 적용된 사고건수가 7만9천675건으로 2.8%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제기했을 뿐이다. 김신범 원진노동안전교육센터 교육실장은 “현행 산재통계로는 산재발생 규모는 물론 원인조차 파악할 수 없다”며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진단을 못하는 의사가 제대로 처방할 수 없는 것처럼 정부의 산재예방정책 역시 실제 산재를 줄이기 위한 처방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잘못된 통계가 잘못된 정책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죽고 다치는지

정부가 발표하는 산업재해율은 사업장의 기계가동률이나 교대제와 같은 작업환경을 감안하지 않고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실노동시간이 줄어 그만큼 유해위험요인 노출정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산업재해 예방활동과 상관없이 재해율이 급격히 줄어들기도 한다. 97년 0.81%였던 재해율이 대규모 구조조정이 단행된 98년 0.68%로 뚝 떨어졌다가 99년 0.74%로 반등한 이유다.

올해 초 발생한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고로 40여명의 노동자가 숨지자 ‘안전불감증’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안전불감증은 대형재해가 터질 때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질타하는 단골메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안전불감증이 원인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여수지역에서 비계공으로 30년째 일하고 있는 서효석씨는 “공사장에서는 발만 삐끗 잘못 디디면 죽는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동료를 보면서 조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서씨는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현장관리자도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에 일을 시키고 심지어 밤에도 공사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안전불감증? 핵심은 노동조건

산재사고는 산업구조뿐만 아니라 노동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동시간이 9시간을 초과할 때 산재발생이 2배가 증가한다는 해외 연구결과도 있다. 예컨대 제조업에서 서비브산업으로 고용구조가 이동하면 직무스트레스와 정신질환 등의 직업병이 늘어난다. 장시간 노동과 교대근무는 뇌심혈관계질환 발생률을 증가시킨다.

김신범 교육실장은 “단순히 산업안전보건법에 관리대상 유해물질 하나를 추가하고 보호안경 지급을 명시화한다고 산업재해가 줄지는 않는다”며 “노동시간을 비롯한 전반적인 노동조건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수 전 노동부장관이 즐겨 인용한 문구 가운데 ‘안전제일, 물질제이, 생산제삼’이라는 말이 있다. 1906년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의 게리 사장이 빈발하는 산업재해에 대처하기 위해 제창한 경영방침이다. ‘안전은 품질, 생산과 표리일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전 장관은 “(게리 사장의 경영방침이)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안전제일’만 맹목적으로 남고 ‘품질제이, 생산제삼’은 빠져버려 주의환기용의 단순한 표어로 전락했다”며 “안전은 생산활동의 원점이라는 본래 뜻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단순한 표어로 전락한 ‘안전제일’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