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이슬’ 네마곤과 15년 싸움

시력감퇴·무정자증·신경쇠약 등 후유증에 시달리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 의회의사당 앞에 천막촌 이루고 농성 중

▣ 마나과(니카라과)=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지난 3월20일 이른 아침,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의 중심가에 위치한 의회의사당 앞. 시원하게 뚫린 4차로 도로 건너편 공터에 있는, 검은 비닐로 덮인 수많은 천막들도 어김없이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천막 위에 세워진 깃발들과 단호한 구호가 적힌 펼침막이 아니었다면, 분쟁을 피해 온 난민들이 잠시 머물고 있는 수용소쯤으로 여겨질 만했다. 초라하고 남루한 천막촌은 깔끔하게 지어진 의사당과 각종 정부청사가 들어선 길 건너편 풍경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선거철에 해결될 듯하더니 끝나니 잠잠

청명하고 시원한 아침 기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30도가 넘는 뜨거운 햇살의 열기가 천막촌을 달구기 시작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마른땅을 어 천막촌 전체로 먼지를 뿌려댔다. 누리끼리한 먼지가 천막촌 전체의 우중충함을 더했다.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구정물과 뒤섞여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는 천막 주인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웅변하고 있었다. 천막촌 안으로 들어가봤다.

열어젖힌 천막 한편에선 여성들이 장작불을 피워놓고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남성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붙이고 곯아떨어진 사람들도 보였다. ‘이방인’을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오랜 기간의 투쟁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배어났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희망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니카라과 바나나 재배 노동자들이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한 건 옹근 15년 전이다. 다국적기업들이 운영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과도하게 사용한 살충제와 농약에 중독돼 병을 얻었고, 삶의 터전은 오염돼버렸다. 이곳 천막촌에서 생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농업 노동자와 그 가족만도 1200여 명에 이른다. 비바스 니카라과 바나나노동자협의회 사무총장은 “이들은 니카라과 전국 2만여 바나나 재배 노동자를 대표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농성천막에서 생활하는 이들 대부분은 마나과에서 북쪽으로 150km가량 떨어진 치난데가 지방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지난 2006년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이곳 농성장은 열띤 분위기였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과 그들을 따라나선 취재진의 발길로 연일 북적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문제가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보였고, 투쟁의 열기는 절정까지 달아올랐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고요함과 적막감이 다시 천막촌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정치인과 언론의 발걸음도 뚝 끊겼고, 바나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언급이라도 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1977년 미국 내 사용 중단된 뒤에도…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산디니스타다. 그들마저도 집권 이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비바스 사무총장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실제로 산디니스타당의 대통령 정책고문은 인터뷰 요청에 “(바나나) 노동자 문제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나긴 투쟁에 지친 노동자들의 소외감은 한층 깊어져 있었다.

농성 지도부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노동자 서너 명이 ‘본부 천막’으로 들어섰다. 탁자 위에는 약봉지가 수북이 담긴 상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난데가 지방 엘비에호 출신이라는 에코르기아(56)는 “척추에 지속적인 통증이 있고, 간에도 이상이 있다”며 “바나나 농장에서 일한 지 5년여 만에 병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바나나 농장에서 일한 지 4년여 만에 척추와 신장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는 레온(49)과 역시 엘비에호 출신으로 13년간 바나나 농장에서 일한 뒤 시력감퇴와 위장·간 기능 이상에 시달리고 있는 델리가호(57)도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뒤에 섰다.

아직도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을까? 델리가호가 어둑해진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도 바나나 농장은 가동 중이다. 하루라도 일손을 놓으면 당장 생계가 곤란하다. 장기적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당장이 급하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힘겹게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 대부분은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이다. 상자 안에 수북이 든 것은 농성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한 약봉투다.

니카라과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죽음의 이슬’로 불리는 ‘네마곤’(DBCP)은 1940년 미국에서 개발돼 세계 각국에 수출됐다. 바나나에 서식하면서 생산량을 떨어뜨리고 형체를 훼손시키는 벌레를 방제하기 위한 강력 살충제다. 네마곤이 주로 사용된 곳은 중미 지역과 카리브해 연안, 필리핀 등 대규모 농장이 밀집한 나라들이다. 니카라과에선 다국적기업들이 운영했던 치난데가 지방의 바나나 농장에서 오랫동안 살포됐다.

그러나 강력한 독성으로 인해 살포 이후 환경과 인체에 끼치는 해악이 워낙 크다는 연구 결과가 미국 안팎에서 오래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에선 이미 지난 1977년부터 사용이 중단됐고, 1979년엔 아예 법적으로 생산과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미국 밖에선 사정이 달랐다. 네마곤은 니카라과에서 1993년까지 합법적으로 살포됐다.

다국적기업, 경고도 보호장비도 안 줬다

중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나카라과는 바나나 생산이 중요한 수입원이다. 하지만 바나나 산업의 높은 수익성은 니카라과 노동자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농성 노동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치난데가 지방 바나나 농장에서만 네마곤에 오염돼 숨진 노동자가 1쳔여 명에 이른다. 지금도 2만여 명이 각종 중독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네마곤이 만들어낸 환경오염으로 신체상의 이상이 발견된 노동자 가족들도 농성 천막촌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네마곤에 중독된 바나나 노동자의 80%가량이 무정자증으로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2년과 2003년 두 해에 걸쳐 치난데가 지방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추적한 비뇨기과 전문의 알타미라나(37)는 “네마곤에 오염된 여성들은 유산을 하는 경우가 많다. 유방암에 걸리는 비율도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바나나 노동자들은 이 밖에도 피부 변색과 지속적인 두통, 골수 통증, 체중 감소, 시력 감퇴, 손톱과 머리카락 상실, 신경쇠약, 간염, 신장암과 위암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단다.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스탠더드 프루트’가 운영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다. 당시엔 회사 쪽에서 아무도 네마곤의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았다. 보호장구도 갖추지 못했다. 바나나 나무에 달린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맞아가며 일했는데, 냄새가 나긴 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델리가호는 “농약이나 살충제 살포 작업을 할 때도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장기간 네마곤에 노출돼 있었던 게다.

농성 노동자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다국적기업은 스탠더드 프루트, 델몬트, 유나이티드 프루트 등 농업기업과 다우케미컬, 셸 등 네마곤 생산업체들이다. 싸움은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바나나 노동자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 네마곤 중독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피고 쪽 변호인단은 “자기 나라의 후진적인 생활환경과 의료체계로 인해 벌어진 일을 다국적기업에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국적기업이 ‘위로금’ 조로 제시한 ‘푼돈’에 오랜 투쟁에 지친 병들고 나이든 노동자들이 흔들리고 있는 이유다.

인과 관계 증명이 쉽지 않아

‘배신자.’ 취재를 마치고 천막농성장을 빠져나오다 마주친 50대 노동자는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배신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디니스타의 약자인 ‘FSLN’이란 글자가 선명히 찍힌 모자를 쓴 그는 자신을 “산디니스타 혁명가”라고 밝혔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농업 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기에 가능했다. 다시 그들이 집권한 니카라과에서, 바나나 노동자들의 절규는 4차선 도로 건너편에 우뚝 솟은 의사당과 정부청사에 여전히 메아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 알타미라나 인터뷰

장기농성은 환자에겐 너무 가혹하다

“영양 공급과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환자들을 농성 현장으로 내모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다.”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에서 약 150km 떨어진 에스텔리 지역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비뇨기과 전문의 알타미라나(37)를 동료 의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그는 2002~2003년 치난데가 지방에서 네마곤에 중독된 바나나 재배 노동자 수천 명을 진단·치료하는 작업을 도맡았다. 인터뷰에 앞서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바나나 노동자들 진료는 어쩌다 맡게 됐나?

=네마곤에 중독된 바나나 노동자들을 대신해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던 카를로스 고메르즈 변호사가 요청을 해왔다. 2년여 동안 바나나 대농장이 몰린 치난데가 지방에서 노동자들의 증세를 살피고, 긴급을 요하는 환자는 치료도 했다. 그 2년간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내 손을 거쳐갔다.

네마곤 중독 노동자들이 주로 보인 증상은 뭔가?

=개인적으로 가장 놀랐던 건 바나나 노동자들 가운데 80%가량이 무정자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력 살충제인 네마곤에 중독되면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우선 정자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이어 성적 욕구가 사라지게 된다. 관절이 약해지는 증상이나, 피부가 변색되는 증상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지속적인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고, 극심한 무기력증을 겪는 이들도 많았다. 심한 경우엔 신체 일부가 마비된 노동자도 있었고, 이 밖에 위장이나 간·신장 등 장기 기능이 나빠지거나 시력을 잃은 노동자도 있었다.

15년째 농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바나나 노동자들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한데.

=가장 큰 문제는 다국적기업들의 태도다. 제3세계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선, 소송을 대리해주는 변호사들이나 지역 정치인들의 중간착취 문제도 심각하다. 변호사들과 일하면서 목격한 것인데, 다국적기업에서 약간의 보상금을 내놓는다 해도 변호사와 각급 단체 지도자들에게 대부분 돌아간다. 실제로 피해를 당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몇 푼 돌아가지 않았다. 다국적기업을 위해 장기간 법정 공방을 벌이는 변호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구조 때문에 병들어 허약한 노동자들이 지금도 고통을 참아가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진단·치료를 하면서 노동자들과 가장 긴밀히 접촉한 외부인일 텐데, 해결책은 없는 걸까?

=의사 신분에 주제 넘는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바나나 노동자들을 진단·치료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목도해왔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벌이는 시위는 다른 시위와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바나나 노동자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환자들이다. 적절한 영양 공급과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환자를 장기간 불결한 생활환경 속에서 농성하게 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무방비 상태로 독성이 강한 살충제에 노출돼 건강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신속한 보상과 적절한 의료지원이 절실하다. 아울러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이익에 이용하려는 모든 행동은 그만둬달라.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니카라과 정부가 신속한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