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4-17 06:01 |최종수정2008-04-17 10:19

석면 잠복기간 최대 50년 이상…취급 노동자 모두 `건강피해 우려’

피해자ㆍ환경단체 “정부 전면적 역학조사ㆍ피해자 구제책 마련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작년 12월 3년간의 기나긴 법정 싸움 끝에 석면 질환으로 숨진 아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안병규(56)씨.

소송 상대측인 J화학이 항소를 포기하며 소송 결과가 확정됐지만 안씨는 올해 초부터 `전국석면 피해자와 가족협회’를 만들어 석면 피해자들을 찾아 다니며 피해자 구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석면이니 소송이니 이젠 `지긋지긋한’ 일이지만 안씨가 이렇게 단체까지 만들어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은 어디선가 원인도 모른 채 병마와 싸우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안씨가 최근에는 석면 공장 옆 초등학교에 다녔던 졸업생을 찾느라 분주하다.

사연은 이렇다. 안씨의 부인이 일하던 J화학은 1969년부터 1991년까지 부산시 연산동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석면의 `공포’가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회사의 석면 관리 역시 엉성하기 그지 없었다.

문제는 공장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송 과정에서 안씨는 석면이 공장 인근 주민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특히 면역력이 약하고 성장이 빠른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공장 옆에 있던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떠올렸다.

연신초등학교라는 이름의 이 학교는 공장에서 기껏해야 50~1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석면이 비산(飛散) 정도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치 공장 안에 있는 것 처럼 석면에 직접적으로 노출이 됐던 상황이었다.

석면의 인체 내 잠복기간이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50년이상도 가능하기 때문에 초등학교 학생들 중 이미 석면으로 인한 질환이 발병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제 곧 발병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게 안씨의 판단이다.

당시 석면에 노출됐던 어린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위험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중년의 어른이 돼 전국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을 그 아이들을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 광범위한 석면피해…”석면피해 이제 시작” = 이 같은 안씨의 최근 활동은 석면피해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는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석면 공장들이 유난히 많았던 부산의 경우 큰 곳만 쳐서 모두 9개의 공장이 가동됐던 것으로 시민단체들은 파악하고 있다.

한때 전국적으로 40여개의 석면 공장이 운영됐고 여기에 석면 채취 광산의 노동자들과 석면 원재료를 운반했던 항만의 하역 노동자들이 석면을 직접 접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석면 피해우려가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석면으로 인한 질병이 잠복기가 긴 것은 석면의 입자가 몸속에 쌓여가며 외부로 배출되지 않고 있다가 차츰 암세포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강동묵 교수는 “석면 관련 질환은 폐 속에 들어온 석면 분진이 세포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잘못된 세포가 분열되면서 차츰 암세포로 발전되는 방식으로 인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질병의 잠복기간이 길다”며 “이 때문에 석면으로 인한 피해 사례는 이제 본격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 석면 `기적의 광물’에서 `조용한 살인자’로 = 석면(石綿ㆍasbestos)은 지름이 머리카락의 100~400분의 1(0.01~0.04㎛)에 해당하는 가는 섬유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흔히 `돌솜’으로 불린다.

한때는 내화성, 절연성, 내부식성이 뛰어나 `기적의 광물’로 각광을 받으며 선박 재료나 절연재, 천장, 타일 등의 건축재로 폭넓게 쓰였지만 결국 1960~1970년대에 이르러서 석면으로 인해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조용한 살인자’로 악명이 높아지며 지금은 국제적으로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석면은 두께가 얇은 가는 실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호흡기를 통해 폐에 들어가면 악성중피종이나 석면폐증, 폐암 등의 질병을 발생시키며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면서 바람을 타고 인근지역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주변 주민들의 호흡기에 들어갈 수 있다.

강 교수는 “석면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은 석면 공장 반경 2㎞정도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지만 멀게는 공장이 있던 곳에서 10㎞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가 해외 학회에 보고된 적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가 작년까지 10년간 부산지방에서 발생한 악성중피종 환자 25명의 거주지를 조사한 결과 이 중 절반이 넘는 13명이 석면공장들로부터 반경 2㎞ 안에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악성 중피종은 흉막, 복막, 심장막을 감싸고 있는 가죽세포에서 발생한 악성 종양이다. 잠복기가 긴데다 암세포가 넓게 막에 붙어 퍼져나가기 때문에 질환 사실을 알더라도 수술을 통해 제대로 치료하기가 어렵다.

석면폐증은 석면 먼지를 들이마셔 생기는 진폐증의 일종이다. 흡입된 석면은 기관지나 허파꽈리를 자극해 염증을 발생시키고 결국 허파꽈리를 벌집 모양의 섬유질로 바꾸어 놓아 폐의 탄력성을 떨어뜨리고 호흡을 곤란하게 만든다.

◇ 피해자들 “이유도 모른 채 결핵약만 먹었어요” = 안씨의 소송이 승리로 돌아간 뒤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에는 이미 사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모두 60여명의 피해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석면공장을 그만둔 뒤 이유도 모른 채 길게는 수십 년간 병마와 싸워온 사람들이다.

작년 10월 숨진 안씨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1976년부터 2년간 J화학에서 석면 천을 만드는 일을 했던 부인은 이후 회사를 그만둔 뒤 26년이나 지난 2004년 1월 처음 병원을 찾았다. 가슴이 이유도 없이 두근거리는 일이 많고 심장은 무엇인가에 찔리듯 아팠기 때문이다.

여러 병원을 옮겨다닌 끝에 같은 해 7월이 되어서야 석면이 질병의 원인인 악성중피종인줄 알게됐지만 이미 치료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또다른 피해자로 석면폐증을 앓고 있는 박정희(51)씨의 경우 함께 J화학에서 일하던 언니 2명과 함께 3자매가 석면으로 인한 질병에 걸려 피해를 봤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시아버지마저 석면폐증을 앓게 돼 집안 전체가 비극을 맞게 됐다.

박씨의 큰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36살 나이였던 지난 1989년 “공장에서 일했던게 뭔가 잘못됐던 것 같다”며 숨을 거뒀고 둘째언니 역시 얼마 전에 석면폐증 진단을 받은 뒤 악성종피증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의사로부터 들었다.

1995년 둘째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가슴통증에 시달렸고 이유 없이 기침이 나왔다는 안씨는 보건소에서 결핵 진단을 받고 결핵약을 먹다가 위장염에 시달려야 했다.

안씨는 “공장에서 언니들과 함께 일할 때에는 마냥 즐거웠었지만 그때의 추억이 이런 험한 결과를 낳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 “뒷짐만 지고있는 정부”…피해자 구제 대책 `시급’ = 석면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3년 이상 석면 취급업무를 한 노동자가 무료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시키고 환경보건법에 오염 원인자가 배상을 못할 경우 국가가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 국가 배상의 길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피해자들과 환경단체들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경우 석면 취급 기간이 3년이 안되더라도 관련 질환을 앓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검진의 혜택을 받도록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

지난달 제정된 환경보건법 역시 정부가 국가 피해배상의 가능성만 열어 뒀을 뿐 구체적인 구제방식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특별법인 `석면신법’을 제정해 3년간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아 정부 차원에서 구제에 나서고 피해자들을 적극 추적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정부의 대책이 부족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부산환경운동연합 김인지 간사는 “석면을 직접 다루던 노동자들 뿐 아니라 석면 공장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에 대해 정부가 추적 조사를 벌여야 한다”며 “아울러 환경보건법 시행령에 석면 피해자들을 보상할 수 있는 방안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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