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노동절, 초대받지 못한 그들]
2008-05-01 오후 3:02:23 게재
5월 1일 노동절,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노동자가 많다. 각종 산업재해의 고통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부당한 해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의 한숨이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30일 청와대에서 노동절을 맞아 노사관계 등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훈장을 주고 다과를 함께 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노동절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아직도 많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근로자 가족
“애들이 아빠 찾으면 눈물나”
30대 남편 먼저보낸 정애정씨 … “회사는 문제 덮지 말고 사망원인 밝혀야”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역앞 한 아파트. 정애정(여·31)씨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았다.
거실 벽에 걸린 크게 출력한 두 아이 사진이 눈길을 끌었으며 탁자엔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그 사진 속엔 3년 전 사별한 정씨의 남편 황민웅씨도 있었다.
정씨와 황씨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에서 만나 결혼한 사내커플이었다. 지난 2001년 10월 결혼한 이들은 2005년 7월 남편 황씨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삼성전자에서 일했다. 아내 정씨는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했고 남편 황씨는 같은 라인에서 설비엔지니어 일을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백혈병 = 건강하던 황씨는 2004년 10월 갑작스럽게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정씨는 “당시 무척 당황스러웠다”면서도 “세상을 떠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며칠 뒤 정씨가 둘째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선 정씨 부부는 “모든 일이 잘 되려나 보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씨의 병은 기대와 달리 급속도로 악화됐다. 진단 직후 항암치료를 시작한 황씨는 “날아갈 것 같다”고 좋아했지만 곧 바로 상태가 악화돼 2차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황씨는 그 뒤로 여러차례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합병증까지 더 해져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황씨가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 정씨는 임신한 몸으로 간병을 해야 했다. “하루 10~20분밖에 못자고 간호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아내의 정성도 깊어가는 황씨의 상태를 되돌리지 못했다. 골수이식수술 날짜까지 잡았지만 결국 황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개인적인 병이 아닌 산재” =
정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도 삼성전자에서 일했다. 혼자서 아들, 딸 키우기 위해 3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어린이 집 교사 자격증을 땄다. 정씨는 지난해 3월 삼성전자를 그만 뒀으며 지금은 친정식구가 있는 시흥 오이도역 앞으로 이사해 어린이집 교사를 하고 있다. 정씨는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정씨가 산재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건 올해 들어오면서다. 그는 “그동안 남편의 병을 개인적 질병으로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삼성 반도체 근로자 가운데 백혈병 환자가 여러명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씨는 “가족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30대 젊고 건강한 근로자가 갑자기 백혈병에 걸렸다는 게 이해가 안됐다”며 “같은 사업장에 또 다른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아 남편의 병은 산재였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현장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근로자가 병에 걸릴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도 미처 생각을 못했다”면서 “생산라인은 대기압력이 높아 코피를 자주 흘리는 근로자도 있었으며 화학약품 냄새 때문에 후각이 마비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아빠 찾을 땐 피 토하고 싶은 심정” = 정씨는 산재라는 인식을 갖게 됐으면서도 20년 이상 몸 담았던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는 “만일 내가 병에 걸렸으면 남편은 망설이지 않고 진실 규명을 위해 나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가족과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지난달 28일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가족 4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을 찾아 집단산재 신청을 했다.
정씨는 “개인적으론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감정을 또 끄집어내기가 싫었지만 중요한 건 진실규명이라고 생각했다”며 “회사측도 문제를 덮으려고만 할 게 아니라 백혈병 발생 원인을 찾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씨는 아들 희준(5)군과 딸 예인(3)양이 아빠 얘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빠 얼굴을 기억하는 희준이에게 ‘아빠는 돌아가셨다’고 말을 해도 ‘언제 아빠가 오느냐’고 묻곤 해 엄마를 당황케 한다고 한다.
정씨는 “아빠 얼굴을 모르는 딸 역시 친구들에게 ‘나도 아빠 있다’고 말할 땐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두 아이에게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선 기자 sslee@naeil.com
점거농성 300일, 이랜드 아줌마
“하루빨리 매장으로 가고싶어”
살림 보태려 시작했는데 갑자기 해고 … “1년이 다 돼가는데 해결 기미 안보여”
지난달 28일 서울 양천구 홈에버 목동점 정문앞.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과 시민단체 회원 100여명이 ‘차별철폐 대행진’ 집회를 열었다. 처음엔 홈에버 영업장을 지키는 민간경비 회사 직원과 노조원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다툼은 10여분만에 정리되고 집회가 열렸다.
홈에버 월드컵점 노조 대의원 정미화(여·45)씨는 이날도 동료노조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은 상암동 월드컵 점에서 일하지만 이랜드에 소속된 다른 지역 홈에버·뉴코아 매장앞에서 열리는 집회에도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하지만 정씨는 집회 내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이 알려지면 회사측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상당수 여성 노조원이 정씨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10개월 동안 이어진 파업 과정에서 터득한 노조원의 자기방어책이다.
◆어려워진 살림, 비정규직 취업 = 정씨는 지난 2003년 ‘홈에버’의 전신인 까르푸에 청과야채 판매원으로 입사했다. 정씨는 비정규직 판매원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남편 사업이 어려워진 데다 당시 큰아들이 중학교에 진학해 사교육비 부담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환위기 후 어려움을 겪던 남편 사업이 2002년 부도가 나서 무슨 일이든 해야할 처지였다”며 “ 아들 둘을 챙겨야 할 형편이라 급여는 적지만 집에서 10분정도 걷는 거리에 있는 까르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정씨가 맡은 일은 청과야채 가운데 시든 물건 골라내기, 손님이 선택한 물건 포장하고 저울에 다는 일 등이었다. 한 달은 새벽 4시에서 오후4시까지 일하고 다음 달은 오후 3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일하는 식으로 교대근무를 했다.
정씨는 이렇게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했으며 두 아들과 남편은 정씨가 미리 차려놓은 밥을 스스로 챙겨 먹으면서 생활했다. 처음 입사할 때 70~80만원이던 정씨의 월급은 3년 후 85~90만원으로 올라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 갔다.
그러나 지난 2006년 5월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처음에는 정씨와 동료들 모두 이랜드가 인수하면 더 좋아질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정씨는 “급여는 동결됐으며 모니터링 제도가 생겨 늘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직원과 비정규직사이의 위화감도 커졌다. 정씨는 “회사측은 비정규직에겐 새해 인사를 담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을 정도로 차별했다”고 말했다.
◆노조가입, 고난의 행군 = 지난해 6월30일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근로자 500여명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홈에버 매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돼있는 비정규직 법안을 회피하기 위해 회사쪽이 기간제 근로자를 계약해지하고 외주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 이후로 이랜드그룹 계열사인 뉴코아·홈에버 매장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근로자 900여명이 해고됐다.
정씨는 점거농성에 들어가기 한달 전 노조에 가입했다. 그는 “이랜드가 인수하면서 고용불안을 느끼던 차에 동료가 권유하기에 주저 않고 가입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물론 농성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파업이 300일이상 길어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는 파업이 길어지면서 “힘들고 갈등도 많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얼마 전 고등학교 다니는 큰아들이 “학원 안다니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말해 정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 남편이 많이 배려해 주고 두 아들도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정씨가 힘들어 할 때마다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며 격려한다.
정씨는 “사회적 파장이 큰 파업이 1년 가까이 진행되는데도 회사측이 아무런 책임을 못느끼는 것 같아 답답하다”며 “회사측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문제가 풀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하루 빨리 사태가 해결돼 매장에서 일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상선 기자 ss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