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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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제 글쓰기나 연설을 만나는 덕분에, 이런 감수성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게, 제가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나 J. 해러웨이
해러웨이를 읽는 사람들은, 위의 인용처럼, 해러웨이가 펼치는 이론을 습득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감수성에 눈을 뜨게 되고, 과거에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옮긴이가 4년 전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번역할 당시에도, 지루하고 까다로운 번역작업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간간이 청량제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해러웨이는 면역체계를 설명하면서, 면역이란 우리 몸에 이질적인 것이 침입하면 그에 대한 항체를 만드는 과정이므로, 면역체계는 자기-인식 장치이며, 자기/비자기의 개념들을 감독하기 위한 장치라고 제안한다. 또한 이 체계를 자기와 타자 간의 인식(recognition)과 오인(mis-recognition)을 안내하도록 그린 지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통상 에이즈(AIDS)라고 부르는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은 바로 타자를 자기로 오인하므로 생기는 병이다. ‘자기와 타자 간의 인식과 오인’이라는 개념은 쉽게 알튀세르의 이론을 상기시킨다. 해러웨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 몸에 기생하는 수많은 유기체들이 자기인가? 타자인가? 묻는다. 숙주의 시각에서 보면 타자이지만, 숙주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기생자의 시각에서 보면 자기라는 게 해러웨이의 논리이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도킨스의 저서 『확장된 표현형』을 이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여럿’이라는 개념도 무너진다. ‘하나’와 ‘여럿’ 같은 너무나 상식적인 개념은 또 다른 설명으로도 쉽게 붕괴된다. 소위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라는 단세포 유기체의 특질에서 끌어낸 것인데, 이 생물체에는 다섯 종류의 박테리아가 기생하고 있다. 숙주도, 기생하는 박테리아들도 서로 독립해서는 살지 못하는 공의존 관계에 살고 있으므로, 이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라는 유기체가 하나의 개체인가? 여섯 개의 개체인가? 하나라면 어디까지를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라고 불러야 하나? 등등의 문제들이 생긴다. 이런 논리전개는 해러웨이에게는 매우 상식적이다.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생물 세계에서 이런 예들을 찾아내어, 그 특징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그녀의 표현대로 “재기술(再記術)하는데, 이 때에는 인문과학적인 해석이 첨가된다. 면역체계를 ‘자기와 타인 간의 인식과 오인’이라고 재기술하였듯이, 그리고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를 ‘하나’와 ‘여럿’의 개념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경계적 피조물이라고 부르듯이, 그녀는 구체적인 생물체를 은유로 사용하여 인문사회과학적 담론으로 만든다. 영장류동물은 어느새 식민 담론, 페미니즘 이론, 인종차별주의와 연결되고, 사이보그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즉 여성의 노동문제, 정보과학 등과 연결된다. 본 대담집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총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해러웨이의 간략한 전기와 함께, 그녀의 유명한 학위논문이자 첫 저서인 『크리스탈, 직물, 그리고 장(場)』을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두 번째 저서인 『영장류의 시각』이 영장류학계를 강타한 충격에 대해, 그리고 세 번째 부분에는 세 번째 저서인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들어 있다. 아직 여기까지는 서론의 연장인 듯이 보이며, 해러웨이 저술 전체를 가로지르는 방법론에 관해 설명한 네 번째 부분과 가장 최근 저서인,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남자ⓒ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페미니즘과 기술과학』(1997)의 주요 개념에 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 다섯째 부분이 이 대담집의 본론에 해당된다. 여섯째 부분이자 종결 부분은 해러웨이가 독자에게 해주는 짤막한 조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해러웨이의 방법론과 1997년도 저서에 나오는 주요 주제를 보며 해러웨이의 독특한 사고방식 혹은 방법론에 주목하기로 한다. 우선 해러웨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생물계의 현상이나 물체를 집중하여 탐구한다. 그리고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의 예에서 본 것처럼, 그 유기체의 독특한 생물적 특징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문사회과학적 담론과 연결시키는 은유로 사용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여기에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생물학 세계를 “은유 이상의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생리학적․담론적 은유들뿐 아니라 설화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이 해러웨이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해러웨이는 도처에서 자신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유전자가 이식된 생쥐 앙코마우스TM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특허 받은 생쥐는 유방암 연구를 위한 연구유기체이지만, 단순히 특허, 상표화, 재산권 등의 후기자본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인간구원(유방암 치료)을 약속하며 인간을 대신하여 고통을 인내하다 죽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해러웨이의 전기를 보면 그녀가 아일랜드-가톨릭교 배경의 영향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고, 그래서 가톨릭교의 영향이 그녀의 작업에 깊이 배여 있음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가톨릭교의 가장 큰 영향은 그녀가 생물학 세계에서 추상관념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추상관념 또한 비유나 은유를 통해 물질화하는 그녀의 독특한 방법론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육화하여 예수로 이 땅에 왔다는 해석, 교회나 성당에 기독교의 추상관념들이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 그리고 특히 가톨릭의 경우 성체나 성찬의 개념 등으로 예수를 피와 살로 표현하는 것 등등, 추상적인 종교가 물질화되고 기호화되고 있듯이, 해러웨이도 그런 종류의 작업을 한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서슴지 않고 우리의 상식을 깨는 또 하나의 주장을 개진한다. 우리가 하는 말과 언어가 사상보다 육체에 더 가까우며, 육체 또한 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육체뿐 아니라 세포도, 유전자도 물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러웨이에게 세포는 상호작용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을 갖고 있지 않은 과정들을 부르는 이름이고, 유전자는 관계성이란 장의 매듭으로, 계승을 자리매김하고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체화과정이지만, 굳이 물체인 양 유포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러웨이는 유전자가 인지적 물신주의, 즉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에 잘못 놓인 오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유전자 물신주의’라고 부른다. 그녀의 설명이나 주장을 들으면 어리둥절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체가 은유로, 혹은 설화나 추상관념으로 진화하는가 하면, 추상관념이 물체로 바뀌는 등 그녀의 방법은 그녀가 표현한 대로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물질적-기호적 실재물이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하며, 사실과 허구,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성과 기호성, 자연과 사회, 자연과 문화, 유기체와 기계 등 기존의 이분법이나 이항대립의 동시성을 강조한다. 이항대립이 억압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있다는 뜻이다. 해러웨이의 기발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예를 몇 가지 더 들자면, 우선 그녀의 주요 방법론으로 거론된 회절이라는 개념이 있다. 회절은 좁은 틈을 통과한 빛이 분산됨을 말하는 물리학 개념인데, 이것을 반사개념과 비교하여, 똑같은 상을 만들지 않고 차이를 만드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또한 회절실험을 할 때 한편에 스크린을 세우면 빛이 지나가는 길을 볼 수 있다는 데 창안하여 회절을 역사적 개념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해러웨이가 회절의 한 예로 든 사건을 보면, 가정분만운동을 하던 제자가 가정분만의 상징으로 모자에 기저귀 안전핀을 달고 다녔다. 처음에는 안전핀과 가정분만과의 연결관계에 대해 의심하였지만, 그 안전핀을 플라스틱산업, 철강산업, 안전 규정 장치 등등의 역사들과 연결시켜 생각하다 보니, 즉 회절시켜 사고해 보니, 자본 형성 및 산업의 역사들 속에서 그 안전핀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회절은 해러웨이 작업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그녀는 미국 대중문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흡혈귀에게서 순종 혈통보호와 인종차별주의를 연상해 낸다. 이런 그녀의 특징은 그녀에게 냉철한 자연과학자의 모습 외에 인문사회과학적인 성향, 즉 설화를 이용하여 사회나 문화를 비판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런 인문사회과학적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은 네 번째 저서의 제목에서 쓰인 “겸손한 목격자”에 대한 그녀의 설명이다. ‘목격’이란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곳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다.” 이 정의는 목격에 대한 사실적 설명(과학적 설명)에서 서서히 목격자 자신의 정체성 및 신뢰성과 관련된 심리적 불안감(인문학적 설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역사적인 목격자가 되기 위해 세계의 곳곳의 갈등지역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목격이 반-이데올로기적 참여(사회과학적 설명)가 되는 설화를 펼친다. 대담을 담당한 해러웨이의 제자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구디브는 해러웨이에게 설화로 해석할 수 없는 여러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해러웨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설화 속에서 사는 문제에 관한 겁니다. 이 세계에 설화 밖이라는 곳은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영향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던 데리다의 논법이 쉽게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런 방법론으로 탄생한 그녀의 이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두 개의 상반되는 개념들, 즉 이항대립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자연문화”(natureculture)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하여 설명한다. 자신에게 자연과 문화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하나였던 것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런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분리된 것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사적 과정 속에는 여러 그룹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다. 그리하여 해러웨이는 자연/문화, 기계/유기체, 인간/동물, 물질적/기호적 등 이항대립의 경계면, 혹은 접촉면에 주목하게 되고, 그 결과 해러웨이의 개념들은 기존 상식을 깨면서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면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면, ‘고장’과 ‘질병’은 부정적이기만 한 상황이 아니다. “고장은 인간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고장은 회피해야 할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도구로 사용할 때 관여하게 되는 도구들의 네트워크의 어떤 양상을 가시화하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 고장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유대관계를 드러낸다.” “질병의 위협은 건강의 주요 구성요소들 중 하나이다.” 이 두 개의 인용은 해러웨이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저서에 인용한 글이지만, 그녀의 이론에 중요한 글들로, 부정에서 긍정을, 긍정에서 부정을 찾아내는 그녀의 사고방식과 잘 부합된다. 따라서 해러웨이는 ‘죽음’에 관해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죽음을 찬미하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지요.” 이것은 그녀 스스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하이데거의 논법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글 고유의 특징인 아이러니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해러웨이는 대학에서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였고, 예일대학원에서 학위논문을 쓸 때에도 순수한 생물학에 관한 것이 아닌 ‘20세기 유기체론에서 사용된 은유들’에 관한, 일종의 생물철학, 즉 인문학적 견지에서 본 생물학에 관한 주제를 채택하였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복수전공한 교육적 배경이 그녀의 특성이 되었고, 더 나아가 동시대의 가장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학위논문 덕분에 그녀는 존스홉킨스대학교의 과학사(科學史)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그 후 샌타 크루즈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의식사(意識史) 프로그램의 교수가 되어, 여러 학문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에 안착하였다. 해러웨이는, 자신의 연구는 의식사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의식사 프로그램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는 학자들의 연구가 환경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끝으로, 해러웨이의 생물학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봄으로써 그녀의 이론세계를 요약하려 한다. 첫째는 “우리가 생물학 세계로서 그리고 생물학 세계 속에서 친밀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유기체로서 생물학 세계의 일원이고, 다른 유기체들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에 준하는 설명이다. 두 번째는, 그녀의 표현을 쓰자면, 첫 번째 설명에서 게슈탈트적 전환을 한 것으로, “생물학은 담론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즉, 유기체인 인간은 물질적으로 기호학적으로 살고 있고, 과거 역사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현재의 복잡한 체계들, 예를 들어, 노동, 자본, 위계질서, 생산성 등등의 체계들 속에 갇혀 있는 생물학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과거의 역사뿐 아니라 동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의 여러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러웨이가 과학을 인문사회과학과 연계하여 연구하는 이유이고, ‘자연’과 ‘문화’를 한 단어의 “자연문화”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런 주장은, 복제나 유전자의 상품화 등 과학기술이나 기술과학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검토해야 하는 개연성이 나날이 급증하는 요즘 시의적절하다. 해러웨이의 이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다. 생물학 세계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인문사회과학 담론으로 변해 있고, 인문사회과학적 담론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자연과학으로 돌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항대립의 경계면, 모순들 등에 집중하다 보니, 앞에서 본 ‘고장,’ ‘질병,’ ‘죽음’ 등의 개념에서처럼 아이러니컬하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디브는 종결 부분에서 이 점을 해러웨이에게 지적한다. 그에 대해 해러웨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영속적인 정열과 아이러니입니다. 즉 정열이 아이러니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 글의 첫 부분에 인용한 것처럼, 해러웨이는 이론 그 자체보다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사유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느끼게 하면서, 무엇보다도 이 때 만들어지는 정열을 전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005년 2월 5일 민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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