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새로운 대지의 창조를 위하여
내가 이 책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들뢰즈와 맑스를 관련시킬 가능성,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 차이의 정치(학)과 코뮤니즘의 정치(학)을 관련시킬 가능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이론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때 이후로, 자본주의적 지구화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의 발전에 뒤이어서,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이 얻은 인기에서 보여지듯이, 차이의 문제는 급진적 정치구성을 둘러싼 논쟁에 더욱 중심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 저작의 정치적 가능성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 실제로, 지젝(Zizek 2004: xi)은 그의 최근의 비판에서, ‘들뢰즈는 오늘날 반지구화주의 좌파 및 그것의 대자본주의 저항의 이론적 기초로 봉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들뢰즈가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과 보조를 같이하도록 만드는 주요한 전파수단은 하트와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이라는 주체였는데 이것에서 다양성, 특이성, 그리고 차이라는 들뢰즈의 개념들이 핵심적 자리를 차지한다.
『제국』의 선구자들인 오뻬라이스모 및 아우또노미아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는 나의 연구는 하트와 네그리의 자율적 다중의 모델과는 다른 정치적 구성의 모델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소수정치(학)’은 카프카와 베케트에게서 발견되는 덜 낙관적인 정조(sentiment)에 의해 이끌린다. 이 정조는, 정치적 실천이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제약들, 공포들, 진부함들, 그리고 ‘갇힌 공간들’에서 시작한다는 인식에서 출현한다. 이것은 낙관주의 대신 비관주의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율적 주체나 동일성이 아니라 자기폐지의 과정이라는 맑스의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조(그것은 카프카와 베케트에게서 분명히 보이듯이 유머와 기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를 그것의 추동력으로 삼으면서, 이 정치(학)은 사회적 평면을 가로지르는 갇힌 공간에서 출현하는 소수자의 기법들, 스타일들, 지식들, 발명들에, 그리고 들뢰즈가 표현하는 것처럼 ‘민중이 없는’ 조건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소수정치(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의 코뮤니즘적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이 책은 들뢰즈와 맑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나는 맑스가 지속적으로 우리가 되돌아가야할,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가 길을 잃어서는 안 될 성스러운 텍스트라고 주장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해석은, 들뢰즈(Deleuze 2004)가 맑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좀더 비판적인 평가들 중의 하나에서 주장했듯이, 정치적 발명을 억제하는 하나의 정치적 기억을 빚어내는 데 기여한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들뢰즈와 맑스 사이의 정치적으로 생산적인 공명의 지점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이 공명은, 정치(학)이 ‘그것의 시를 미래로부터 창조하려고’ 노력함에 따라, (들뢰즈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빌려온 표현을 사용하면) 하나의 ‘새로운 대지’를 ‘지어낼’ 내재적 힘들, 욕망들, 그리고 발명들을 동시적으로 모색하면서 당대의 사회형성체에 대한 내밀한 심문과 비판을 행하는 일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옮긴이] 공유된 관심에서부터 나온다.
이러한 정치(학)의 분맥들(ramification)은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와 아우또노미아, 그리고 좌파코뮤니즘 등에서 가치와 임금, 비물질적 노동과 정동적 노동, 테크놀로지와 지성, 통제사회 등에 이르는 명백히 정치적인 많은 개념들, 조류들, 사건들을 통해 탐구된다. 그러나 소수정치(학)은 동시에 문화적 힘이다. 그래서 논의는 대항문화, 소수언어, 그리고 정치적 글쓰기의 스타일 등에서부터 동일성에 대한 비판, 정치적 감정(emotion)의 성격 등에 이르는 문화적 관심사들, 형식들, 발명들에 대한 설명에 의해 횡단된다.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9/11 이후에 제도화된 항구적 비상사태의 새로운 제국 체제가 결합된 힘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 지구적이고 준안정적인 전체의 수준에 조절된 코뮤니즘적 분석을 더욱더 긴급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분석이 우리를 이 과정의 특수하고 지역적인 경험들과 분맥들로부터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 도전하는 운동들, 지식들, 전술들, 발명들의 복잡성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확실히 이것은, 들뢰즈와 맑스의 만남이 자극하는 거시적이자 동시에 미시적인 깨달음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볼 때, 런던에서 쓰 이 책이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다양한 논쟁들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고 카프카가 소수문학의 활력소(life-blood)라고 말한 ‘끊임없는 활기’와 비판에 더욱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이 책이 쓰여진 이러한 정신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목적[‘끊임없는 활기’와 비판에 참여하는 것-옮긴이]에 따라서이다.
이 책을 위해 쏟은 옮긴이 조정환과 갈무리 출판사의 노력에 커다란 감사를 표하며
니콜래스 쏘번, 런던,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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