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요소 발견땐 누구든 “작업중지” 휘슬
노동재해 왕국 멍에를 벗자 ⑦ 노동자 결정권 없는 안전·보건 없다

▲ 10월4일 오전 영국 로이스턴의 제이엠 공장에서 노조의 노동안전대표 브라이언 커시스가 곳곳을 살펴보며 위해성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로이스턴(영국)/특별취재팀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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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노동현장 탐방

지난달 4일 오전 자동차엔진 청정용 부품을 만드는 영국 로이스턴의 제이엠 공장. 공장 안은 잘 정돈된 ‘헬스클럽’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단정했다. 이른바 ‘위험공정’은 모두 자동화해 노동자들과 격리시킨 상태였다.

그럼에도 공장 한 쪽에선 노조의 안전대표인 브라이언 커시스가 공장 안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안전대표자를 그만둔다고 하기 전에는 회사에서 마음대로 (공정이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며 “공장 작업장의 위험을 조사하고 동료를 상담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옆에서 일하던 마크 캘리(작업반장)는 “안전대표자만이 아니라 일반 노동자도 누구든, 위험요인을 발견하면 작업을 중지시킬 수 있다”며 “그 어떤 경우도 작업을 중지시킨 노동자에게 회사는 책임도 묻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안전문제 대해선 노동자·사용자 함께 결정
노동안전대표 의견 사쪽 무조건 수용해야

콜린 맥케이 영국 보건안전청 연구원은 “공장에서 위험한 상황을 발견하면 누구나 축구 경기의 심판처럼 ‘휘슬’을 불 수 있다”며 “노동재해를 예방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돼왔다”고 설명했다.

사흘 뒤인 7일 오전 독일 마이언주 폴처에 있는 제지회사 바이그의 공장. 입구에서부터 매캐한 냄새가 났다. 고열로 종이를 찌는 제지공장의 공정 탓이었다. 여기서도 노동자들은 유해 환경과 최대한 격리돼 있었다. 그들은 외부와 유리로 차단되고 24시간 맑은 공기가 공급되는 작업실 안에서 컴퓨터로 기계를 조종했다. 공장 한 쪽의 노동자평의회 사무실엔, 가지런히 놓인 100여 켤레의 안전화가 놓여 있었다. 위르겐 되치 노동자평의회 의장은 “노동자들이 언제든 안전화를 바꿔 신을 수 있도록 사용자들이 갖다 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 기업 내 노동자평의회는 ‘안전화 선택’에서 ‘공장 기계 설치 건’에 이르기까지 안전보건 문제를 사용자와 함께 ‘공동 결정’한다. 되치 의장은 “지난 분기에 방열작업복의 교체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지 못했다”며 “최상의 제품을 찾기 위해, 이번 가을 뒤셀도르프 노동안전박람회에 노사가 함께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북유럽 나라들에선 노동안전과 관련한 노동자의 이런 참여·결정권은 더 강력하게 보장돼 있다. 스웨덴은 5인 이상 사업장엔 노동안전보건대표자를 두고, 50인 이상 사업장부턴 노동안전보건위원회를 의무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제도는 단지 구호나 형식에 그치지 않는다. 스웨덴노동환경청의 베르틸 레마에우스 부위원장은 “노동안전보건위원회는 회사 내의 모든 안전 건강 문제를 다룬다”며 “작업중지권과 작업변경(개선)권을 지닌 노동안전대표가 의견을 제시하면 사용자는 이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스턴·런던(영국) 폴처(독일) 스톡홀름(스웨덴)/특별취재팀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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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칠 수 있는 작업은 하지 않아”

안전교육 의무화로 노동자 의식화

노동안전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와 결정권은,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인 노동자의 자각,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교육’에 연유한다고 노동안전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 스웨덴이나 독일의 일반 노동자들에게선 ‘안전보다는 공기를 맞추는 게 우선’이라든지, ‘일을 위해 건강은 조금 포기해도 괜찮다’는 식의 인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남쪽으로 150km 가량 떨어진 뉘셰핑 외곽에서 고압선 매설작업을 하던 올라 요한손(22·사진)은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3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과 맞지 않는 지시를 받아본 적도 없다”며 “다칠 수 있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식으로 보면 육체노동자였지만, ‘단순한 도구’처럼 일하지는 않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와 함께 스스로 작업을 설계하고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땅을 파고 고압선을 매설했다. 작업 중 문제가 생기면 달려오는 ‘프로젝트매니저’는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자에 불과했다. “3년 간 다닌 직업학교에선 노동안전, 환경보호에 대해 철저히 가르쳤고 배운 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건설공사장은 물론 북유럽의 각종 작업장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일을 시작한 뒤에도, 노동자들은 언제든 원할 경우 안전과 관련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 있다.

카이 엘그스트란드 스웨덴국립노동연구소 대외 담당은 “1976년 이후 100여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최소 40시간 이상의 연구소 주도로 이뤄진 노동안전교육을 받았다”며 “노동안전 교육은 성인교육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은 국가와 사회의 가장 귀중한 경쟁력이며, 교육은 이를 추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스톡홀름/특별취재팀

노동자 주체적 참여로 ‘베푸는’ 안전정책 틀 넘어서야

일터의 보건과 안전을 위해선 노동자의 주체적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정부와 사용자가 알아서 주도하는 ‘시혜적’ 노동안전 정책과 제도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과 함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도입했다. 이어 12·12 쿠데타로 등장한 국가보위입법위원회는 81년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했다. 노동안전의 핵심 법률들은 그 탄생의 연원부터 쿠데타 세력이 국민에게 뭔가 베풀어야 했던 정치적 상황이 반영돼 있다. 동시에 이 법률들엔 역대 정권의 주관심사이었던 경제에 안전·보건을 종속시킨 ‘한계’도 그대로 담겨 있다. 법이 제정될 당시 주요 산업이었던 농업과 서비스업이 빠진 채 국가에서 특별히 보호하고자 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과 광업에만 적용된 것은 그 단적인 예다. ‘시혜적인 안전보건’은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이를 베푸는 이들이 용인하는 한도 안에서만 안전보건이 추구되는 탓이다.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노동재해왕국’의 오명이다.

‘베푸는’ 노동안전보건의 틀을 넘어서려면, 반드시 노동자의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 그를 위해선 우선 전문적이고 난해한 안전과 보건 문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권리, 즉 ‘노동자의 알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또 이런 정보에 바탕을 두고 안전과 보건 문제 해결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즉 ‘행동할 권리’가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서구에선 1970년대 이후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이 둘을 모두 제도화했다. 그 결과 유해물질들에 대한 정보를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물질안전보건자료’들이 작성됐고, 노동자들의 의견을 집결하고 요구할 수 있는 노사 간의 협의결정체계가 만들어졌다. 일련의 노력들이 선순환하며, 교육과 훈련과정이 체계화됐다. 또 노동자들이 작업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위험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실제로 작동하는 제도와 전통을 낳았다.

반면 한국에선 이런 알권리와 행동할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법적 조건들이 파편적으로 기술돼 있다. 안전보건의 문제를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할 권리 대신, 여전히 시혜적인 관점에서 이름만으로 포장된 조각난 사업들이 제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업주들이 갖고 있는 물질안전보건자료는 모두 정부기관이 외국의 자료를 베껴 일괄적으로 제공한 것들이다. 사업주들은 실제 사용하는 물질들과 이들 자료를 비교·점검하는 일조차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료의 존재나 그 내용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일부 사업장에서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형식에 그치고 있다. 때문에 현장 노동자가 안전·보건 상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관리자에게 사정하거나 호소하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 작업거부권은 아직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구절로 남아 있다.

노동안전보건에 있어 노동자의 실질적 참여가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일터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얻어야 하고 그에 따른 권리들을 교육받아야 한다. 또 노동자의 안전·보건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자안전보건대표가 선출되고 이들과 사용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가동돼야 한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척도로서 노사관계의 민주화는 안전보건에서의 알권리와 행동할 권리를 통한 참여가 실제로 얼마나 이뤄지는지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백도명/노동건강연대 대표(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특별취재팀

양상우·김기성·정대하·김양중 기자, 백도명(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노동건강연대 대표)

자문

박두용(한성대 교수, 노동건강연대 기획위원), 이상윤(산업의학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